발행일 : 2015.02.12(목) / 종합 A8 면

첫 總選(1948년)에선 여성 19명 모두 낙선… 살해 협박·사무소 습격도 당해


"내 비록 앉아서 오줌을 누지만 조국 독립을 위해 오랫동안 싸웠고, 나라를 세우기 위해 서서 오줌 누는 사람 못지않게 뛰어다녔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첫 내각 발표 당시 화제는 상공부 장관에 임명된 고(故) 임영신(1899~1977) 여사였다. 대한민국 첫 여성 장관이었다. 하지만 상공부 청사에 출근했는데도 결재를 받으러 나타나는 직원이 없었다. 화가 난 임 장관은 퇴근길에 측근들에게 이유를 물었다. 이들은 "'서서 오줌 누는 사람들이 앉아서 오줌 누는 사람에게 어떻게 결재를 받느냐'는 말이 부처 내에 나돌고 있다"고 전했다. 임 장관은 나흘째 되는 날 긴급직원회의를 소집했다. 그 자리에서 임 장관은 "나에게 인사도 안 하고 결재를 받으러 오기 싫은 사람은 지금 당장 보따리를 싸라"고 호통을 쳤다.

임 장관은 광복 사흘 뒤인 1945년 8월 18일 한국 최초의 여성 정당인 '대한여자국민당'을 창당하고 당수에 취임한 여성 정치인이다. 이듬해 9월에는 민주의원 대표 자격으로 도미(渡美), 한국 임시정부의 유엔 가입과 신탁통치안 철폐를 위해 앞장섰다. 이승만 대통령은 1948년 취임 연설에서 "우리 대표로 유엔에 가서 훌륭한 성과를 내고 있는 임영신 여사에 대해서는 우리가 다 고맙게 생각하는 바"라고 치하했다.

1948년 5월 10일 첫 총선거에는 김활란·박순천 등 19명의 여성 후보가 출마했다. 한국의 여성 참정권 인정은 뉴질랜드(1893년)나 독일·미국(1918~1920년)에 비해 반세기 가까이 늦었다. 하지만 2차 대전이 끝난 뒤에 여성 참정권을 부여한 프랑스·일본 등 세계 대부분의 국가와는 큰 차이가 없었다. 〈〉 전국여성단체총연맹(여총)은 풀 그릇과 빗자루를 들고 거리로 나가 담벼락에 포스터를 붙이며 여성 후보들을 지원했다.

하지만 여성 취학률(就學率) 13%, 여성 문맹률 80%에 이르던 당시 여성 국회의원의 탄생은 지난(至難)하기만 했다. 대구에서 출마한 김선인 후보의 선거사무소는 '여자가 설치는 게 못마땅하다'며 수십 차례 습격당했다. 선거 당일인 5월 10일 아침에는 '투표장에 나타나면 사살하겠다'는 협박까지 받았다.

여성 후보와 단체의 분투(奮鬪)에도 첫 총선에서 여성 의원은 탄생하지 않았다. 1919년 3·1운동으로 투옥됐고 1960년대 민주당 총재를 지낸 박순천(1898~1983) 여사도 5518표에 그쳤다. 그나마 19명의 여성 후보 가운데 최다 득표였다. 박 전 총재는 "이번에 우리 여성이 19명이나 입후보했다가 한 사람도 당선되지 못한 것은 유감이다. 다음에는 이번과 같이 '홀아비 국회'를 만들지 않도록 우리 여성은 총궐기해야 하겠다"고 말했다. "상대 후보의 선거 방해 공작보다 더 여성 후보자들의 선거운동에 장애가 된 것은 당시의 사회 분위기였다. 여성의 사회 진출을 가로막는 사회적 편견이 여성의 국회 진출을 어렵게 한 것"(김수자 이화여대 교수)이었다.

이듬해인 1949년 1월 경북 안동에서 보궐선거가 실시되자 임 장관은 출마 의사를 굳혔다. 장택상 초대 외무장관 등 9명이 입후보한 가운데 선거를 치렀다. 7100표를 득표한 임영신 장관의 승리였다. 대한민국 첫 여성 국회의원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임 장관은 "안동은 완고하고 배타주의적인 곳이라고 하지만, 이와 같은 고풍(古風)은 완전히 타파된 셈"이라는 당선 소감을 남겼다.

1950년 2대 총선에는 박순천 전 총재를 비롯해 11명의 여성 후보가 입후보했다. 박 전 총재는 출마 당시 '여성 운동의 총사령관' '조선 여성계의 맹장'으로 불리며 화제를 몰고 다녔다. 그의 종로 선거사무소에는 전국 여성들이 선거자금에 보태라고 보낸 금반지, 금비녀, 금목걸이가 쏟아졌다. 최종 개표 결과 1만1251표로 당선됐다. 2대 총선에서 여성 당선자는 박순천과 임영신 둘로 늘었다.

1954년 3대 총선에서는 대한부인회 최고위원을 지낸 김철안만 당선되어 여성 의원 의석은 오히려 줄었다. 잡지 '여성계'에서는 "청탁하려면 남성이 여성보다 낫다는 생각, 여성 정치인의 공헌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데 대한 실망, 선거구의 환경 개량에 여성의 힘이 약할 것이라는 막연한 판단" 등을 패인(敗因)으로 분석했다. 여성을 무능력자로 규정했던 구(舊)민법 규정이나 남녀유별(男女有別)을 강조했던 사회 인식도 여성의 정계 진출을 가로막는 요인으로 꼽혔다.

하지만 소수의 여성 의원들은 여성 단체들과 연대해서 남녀평등과 여성 권익 향상을 위한 관련법 제정 운동을 벌이며 여성의 정치·사회 참여를 독려했다. 1953년 근로기준법은 남녀의 차별대우를 금지하는 한편, 여성 근로자에 대한 보호 규정을 두었다. 1958년 개정된 민법은 아내를 무능력자로 규정했던 제도를 폐지하고 여성의 분가(分家)를 인정하는 한편, 남편과 아내가 독립해 재산을 관리하는 '부부별산제(夫婦別産制)'를 택했다.

1958년 실시된 4대 총선에서는 박순천·김철안·박현숙 3명의 여성 후보가 당선됐다. 이들은 '홍삼점(紅三點)'으로 불렸다. 그 뒤 여성 국회의원은 1973년 9대 국회에서 처음 두 자리 숫자(12명)에 진입하고, 현재 19대에는 47명까지 늘어났다. 김수자 이화여대 교수는 "초기 여성 정치인들은 여성에게 불리했던 기존 법과 의식 같은 '장애'를 걷어내는 일부터 시작했다. 이런 노력 덕분에 한국 여성들은 대한민국 국민으로 활약하며 한국사 발전에 참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기고자:김성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