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15.12.06 17:30:02 | 최종수정 2015.12.06 20:22:15



나라가 어지러운 것은 정점에서 군림하는 삼각형 리더십 때문이다. 계급화된 자기중심적 리더십은 관민 간의 대립 각만 키운다. 대안은 혼자서 군림하는 각진 리더십이 아니라 21세기 형 `공유한 팀 리더십`이다. 각(角)지기보다 안정적인 원, 거기에 관과 민 두 원의 교집합이 넓을수록 공존의 길이 열린다.

권력은 계급화되기 마련이다. 분권이 쉽지 않다. 대통령제의 대안으로 프랑스의 이원집정부제를 거론하는 것은 대통령과 총리 간의 역할 분담, 즉 분권이다. 겉으로 보기에 그럴듯하지만 계급성이 뚜렷한 권력은 나누어 가질 수 없는 것이 본질이다.

테러로 나라 질서가 엉망이 되어 불만과 불안에 떠는 국민은 저항세력을 압도할 국가권력이 막강하기를 바란다. 반정부 저항세력도 만만치 않다. 서로 민주를 앞세워도 목표는 권력 장악이다. 이런 와중에 질서를 지키는 방패는 국법과 국권밖에 없다고 흔히 믿는다. 보신에 급급한 정부 관리나 느려 빠진 법더러 야당과 민권단체 눈치 보지 말고 단호하게 맞서라고 우리는 주문하지만 매번 허사다.

공권력이 무너지고 정부 권위가 땅에 떨어진 데는 이유가 따로 있다. 정부와 국민의 관계 구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정부는 애써 만든 좋은 정책이라고 읊어대지만 백성들 귀에는 백년하청이다. 정부는 자신만의 리그를 형성하고 시대 변화를 외면하고 바깥 세상의 정서나 감정을 나 몰라라 하기 일쑤이다.

그들의 리그가 우수한 개인으로 구성된 것은 맞다. 똑똑한 머리, 경쟁에서 지지 않으려는 욕심, 명예·성취 제일주의, 자기중심 성향 등으로 철저히 무장된 엘리트들이 득실거린다. 자기밖에 모르는 이들은 자신의 기준만 옳다고 철석같이 믿는다. 지난 정부보다 원리원칙을 고수하는 이 정부조차도 지연과 학연으로 똘똘 뭉친 동질적 집단이 위세를 부린다. 국민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찬하며 잔치만 벌인다. 이들은 서열대로 권한만 챙긴다. 야구에서 4번 타자더러 번트를 대게 하는 팀플레이는 생각조차 않는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서 `보이지 않는 손`은 자본주의 기득권 세력의 자기중심적 위상 지키기이다. 국권의 바탕인 법과 제도와 정책의 기저가 그러니 기득권만 확대 재생산되기 마련이다.

18세기 이마누엘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인간의미법칙을 탐구하며 그 본질을 중심성이나 위상성으로 대변되는 닫힌 정형이 아니라 열려야 한다고 했다.

하버드 법대의 요하이 벤클러는 국부론이 망부론(網富論)으로 대체되어 가고 있다고 말한다. 호혜적 인간이 바탕이 된 공개경쟁과 병렬적 보완으로 공정한 참여와 나눔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1차집단(가족)과 2차집단(정부) 사이에 1.5집단(동료)이 있어서 이들의 생산이 사회적 생산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두 원의 교집합이 여기에 해당된다.

시대 변화를 외면하는 희망 없는 정부. 전유적·위상적 발상으로 철옹성을 쌓은 엘리트집단은 재벌에 면세점이나 허가하는 수준이다. 이런 시대착오적 정부는 존재할 가치가 준다. 엘리트들의 관료적 국정운영 방식이 지속되는 한 대립과 갈등은 사라지지 않는다.

답은 개방적 팀 리더십에 있다. 계급을 버리고 공동체사회를 지향하는 현대사회에서는 혼자가 아닌 더불어 함께하는 이질적 팀이어야 한다. 거기에 바깥 원과 크게 포개져야 국민의 기대에 부응한다. 오만을 떨치고 문을 열어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외부와 호흡하고 분업하는 팀이어야 국민이 솔깃해한다.

대통령은 퇴임 후 개인의 치적은 찬양 받겠지만, 실정은 호된 평가를 받을 것이다. 여기서 국민이 주목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다. 팀이 사다리를 없애고 중심과 위상을 내린 원이 되어 민의 원과 교감하고 같은 의식과 감정을 나누며 국민과 얼마나 호흡했느냐이다. 늦지 않았으니 중심성과 위상성에서 벗어나 교집합의 영역부터 넓혀 국법과 국권의 바탕을 다시 짜기 바란다.

[김광웅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