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01.15(목) 03:06 / 종합 A6 면

[히트곡·베스트셀러로 되짚어본 '해방 공간']

-광복 기쁨 노래한 가요 쏟아져
'사대문을 열어라' '귀국선'… 독립운동 人士·동포들 환영
"쓰는 대로 글이 되고 박히는 대로 책이 된다" 知的욕구 분출로 출판 호황


"사대문을 열어라 인경을 쳐라/ 삼천리 곳곳마다 물결치는 이 기쁨/ 민족의 꽃은 다시 피었네/ 영광된 내 조국 영원무궁하리라."

'광복 가요 제1호'로 알려진 '사대문을 열어라'(고려성 작사, 김용환 작곡)의 가사다. 광복 일주일 뒤인 1945년 8월 22일, 연예 관련 인사들이 종로 2가의 기독교서적빌딩 4층에 모여 해외 독립운동 인사의 환영 준비를 하자는 논의를 한 끝에 축하 곡을 만들기로 합의해서 나온 노래다.

'감격'에서 '아픔'으로 바뀐 정서

1945년 8·15 직후 '광복의 감격'을 노래한 가요들이 쏟아져 나왔다. 해외에서 돌아오는 동포들의 모습을 그린 '귀국선'(손로원 작사, 이재호 작곡)은 "돌아오네 돌아오네/ 고국산천 찾아서/ 얼마나 그렸던가 무궁화꽃을"이라고 했다. 1948년 장세정이 부른 히트곡 '울어라 은방울'(조명암 작사, 김해송 작곡)은 "해방된 역마차에 태극기를 날리며/ 누구를 싣고 가는 서울 거리냐/ 울어라 은방울아 세종로가 여기다"라고 했으며, 2절에서는 "자유의 종이 울어 팔일오는 왔건만/ 독립의 종소리는 언제 우느냐"며 정부 수립을 염원했다.

1945년 10월 12일, 일본에 거주하던 한국인 징용 노동자 가족들이 부산항을 통해 귀국하는 모습.
해외로 떠났던 동포들이 1945년 광복 이후 귀국하는 모습을 보고서 사람들은‘광복의 기쁨’을 다시 한 번 실감했고, 이 정서는‘귀국선’같은 대중가요로 이어졌다. 1945년 10월 12일, 일본에 거주하던 한국인 징용 노동자 가족들이 부산항을 통해 귀국하는 모습. 사단법인 월드피스자유연합이 지난해 공개한 것이다. /뉴시스
1930~40년대를 풍미한 인기 음반과 재킷·가사집.
1930~40년대를 풍미한 인기 음반과 재킷·가사집. 최근 일본 고베에서 발견돼 국내에 들여온 자료들로 2013년 8월 옛 가요사랑 모임인‘유정천리’와 가요 사이트‘폰키’가 본지에 공개했다. 가수들은 당대를 풍미했던 이난영·장세정·김정구·남인수 등이다. /허영한 기자
내용뿐 아니라 곡 형식에서도 새로움이 보였다. 작사자 손로원이 부산 부두에서 귀국 동포들을 보고 만들었다는 '귀국선'은 트로트 리듬에 형식이 무시된 28마디의 곡으로, 그 이전까지 흔하던 일본 음계와는 다른 선율 진행을 보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1942년부터 1945년 광복 직전까지는 흔히 대중가요의 암흑기였다고 알려져 있다. 태평양전쟁의 전시 체제에서 신곡은 군국 가요 일색이었고, 1944년부터는 조선어 가요조차 자취를 감췄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설움의 정서를 담은 '번지 없는 주막' '나그네 설움'(이상 1940) '찔레꽃'(1943) 등이 애창되고 있었다. '목포의 눈물'(1935)처럼 일제에 대한 저항 의식을 우회적으로 담은 가요도 있었는데, '삼백연 원안풍은 노적봉 밑에'라는 2절의 첫 구절은 광복 이후 작사자의 원래 의도에 따라 '삼백년 원한 품은…'으로 고쳐졌다.

일제 말기에 이미 나왔던 상당수 가요가 광복 국면에서 새롭게 불린 것도 주목할 만하다. 사람들은 중·일 전쟁기에 나온 행진곡풍의 노래 '감격시대'(1939)에 광복의 기쁨을 담아 불렀고("거리는 부른다 환희에 빛나는 숨 쉬는 거리다"), 일제 국책 영화의 주제가였던 '복지만리'(1941)는 '고구려의 기상과 독립 염원을 담은 노래'로 알려지게 됐다.

1939년에 나온 '꽃마차'의 원래 가사는 "노래하자 하루삔(하얼빈·哈爾濱) 춤추는 하루삔/ 아카시아 숲 속으로 꽃마차는 달려간다"였으나, 광복 이후에는 "노래하자 꽃서울 춤추는 꽃서울…"로 바뀌었다. 일제 말에 흔했던 중국·만주풍 분위기의 가사 일부를 고쳐 '광복 축하 가요' 대열에 동참했던 셈이다.

광복 직후에 나온 주요 가요 가사.
하지만 대중가요의 이 같은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한국대중가요사'를 쓴 이영미는 "분단과 전쟁의 아픔을 그린 노래는 해방의 기쁨을 노래한 작품과 비교할 바 없이 압도적"이라고 했다. 남인수가 부른 1948년의 '가거라 삼팔선'(이부풍 작사, 박시춘 작곡)은 "다 같은 고향땅을 가고 오건만/ 남북이 가로막혀 원한 천리길"이라며 분단이 낳은 고통을 절절하게 노래했고, 음반 3만 장이 팔렸다. 이 정서는 6·25 전쟁기 '꿈에 본 내 고향' '굳세어라 금순아'로 이어지게 된다.

"활판이 몸부림친다"… 호황 맞은 출판계

"쓰는 대로 글이 되고 박히는 대로 책이 된다. 활판과 석판이 몸부림친다. 사진판, 등사판까지 허덕거린다. 8·15 이후의 장관은 실로 유흥계와 쌍벽으로 출판계였다. 종이의 소비량으로는 아마 조선 유사 이래에 처음일 것이다."(동아일보 1946년 3월 23일자)

일제 강점기 35년 동안 억눌렸던 대중의 지적(知的) 욕구는 광복과 함께 한꺼번에 풀리게 됐다. 일제가 1941년 1월까지 발매와 반포를 금지했던 우리말 책이 342종에 이를 정도로 광복 이전의 출판 탄압은 혹독했지만, 이제 상황이 달라진 것이다. 출판업은 호황을 맞았다. 을유년(乙酉年)인 1945년에 설립된 출판사 '을유문화사'는 지금도 건재하다.

광복 이후 출판사들은 유명 작가의 신작을 기다리지 않고 이미 잘 알려진 작품들을 새로 찍어냈다. 소설 분야에서는 이광수의 '무정', 심훈의 '상록수'를 비롯해 박계주의 '순애보', 방인근의 '마도의 향불', 김말봉의 '찔레꽃' 등이 베스트셀러가 됐는데, 모두 남녀 간의 사랑을 다룬 애정소설로 분류할 수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비소설 분야에서는 민족의식의 고취와 새로운 나라 건설의 의지가 읽힌다. 최현배의 '우리말본', 이광수의 '도산 안창호', 김구의 '백범일지' 등이 베스트셀러로 떠올랐다. 1945년 미 군정청 편수국장이 된 국어학자 최현배가 1937년 초판을 쓴 '우리말본'은 38선을 사이에 둔 남북 간 밀수에서 남한의 주요 수출 품목 중 하나였는데, "'우리말본' 한 짐을 북으로 가져가면 명태 한 달구지를 남으로 가져올 수 있었다"는 말도 전한다.

하지만 출판계가 계속 탄탄대로를 달린 것은 아니었다. 1946년 가을부터 물자난으로 종이를 구하기 어려워져 교과서도 제작하기 힘든 상황이 됐던 것이다. 임화의 시집 '찬가'가 1947년 5월 발매 금지된 것을 시작으로 금서 조치도 다시 고개를 들고 있었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