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02.06(금) 03:06 / 종합 A8 면 

[당시 26세에 출마했던 이철승 헌정회 원로회 의장]

"신탁통치 얘기에 청천벽력"
학생총연맹 위원장으로 反託 학생운동에 앞장


이철승 헌정회 원로회의 의장은 “3·1운동이 제1의 독립운동이라면 반탁 운동은 제2의 독립운동이며, 마지막 독립운동은 통일”이라고 말했다
이철승 헌정회 원로회의 의장은 “3·1운동이 제1의 독립운동이라면 반탁 운동은 제2의 독립운동이며, 마지막 독립운동은 통일”이라고 말했다. /남강호 기자




"실은 내가 건방진 놈이었지."

3일 서울 여의도동 국회 헌정회 사무실. 이철승(93) 헌정회 원로회의 의장이 웃으며 말했다. 1948년 5월 10일 총선거 출마를 결심하던 대목에 대해 인터뷰하던 중이었다. 당시 그는 만 26세였다. 이 의장은 "겨우 피선거권이 생긴 새파란 나이에 어떻게 국사(國事)를 알겠어. 아버님께서도 '구상유취(口尙乳臭)한 네가 무슨 경륜이 있다고 출마하려고 하느냐. 네가 출마하면 난 산으로 가겠다'며 한사코 반대하셨어."

그해 3월 이승만 박사의 부름으로 이화장(梨花莊)에 간 것이 출마의 계기가 됐다. 전국학생총연맹 위원장으로 반탁(反託) 학생운동을 이끌고 있던 그에게 이 박사는 "총선거는 애국 운동이자 문맹 퇴치, 계몽 운동이므로 젊은이들의 참여가 절실하다"며 참여를 독려했다.

무소속 이철승도 기호 3번으로 고향 전주에서 출마했다. 하지만 우익 후보 4명의 득표가 분산되는 바람에 좌익 후보에게 900표 차이로 석패(惜敗)하고 말았다. 그는 "우익이 난립하면 어떤 정치인이 나와도 좌익에게 패할 수밖에 없다는 뼈저린 교훈을 얻었다"고 했다. 1950년 2대 총선에서도 후보 27명이 난립하는 바람에 고배를 마셨다. '3수' 끝에 1954년 3대 총선에서 국회에 입성한 그는 1985년 12대 총선까지 7선을 기록했다.

이 의장은 일제 말기 학도병으로 끌려가 일본 와카야마(和歌山)현의 보병 연대에서 광복을 맞았다. 그는 콩나물시루 같은 밀항선을 200여 명과 타고 여수를 통해 귀국했다. 당시 스물셋의 그를 광복 직후 격렬한 좌우 대립의 현장으로 불러낸 건, 한반도 신탁통치안(案)을 발표한 그해 12월 27일 모스크바 3상 회의였다.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던 이철승은 겨울방학을 맞아 귀향하기 위해 서울역으로 향했다. 하지만 이리와 대전 구간에서 열차 충돌 사고가 일어나는 바람에 열차 운행이 중단됐다. 명동 다방에서 운행 재개를 기다리던 그는 다음 날 신문 호외에서 '신탁통치'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이 의장은 "광복의 희열이 싹 가시는 듯한 청천벽력(靑天霹靂)이었다"고 했다.

보성전문(현 고려대) 학생회 준비위원장이었던 그는 다음 날 곧바로 동료 학생들과 함께 반탁 전국학생총연맹을 결성했다. 경교장에서 반탁 학생들을 맞이한 김구 선생은 "백만 원군을 얻은 것 같다"고 반가워하면서 '반탁승리(反託勝利)' '진충보국(盡忠報國)' 휘호 2점을 그에게 써줬다. 지금도 그는 이 휘호를 간직하고 있다.

이 의장은 "맨주먹으로 싸워서 대한민국 탄생의 산파(産婆) 역할을 했다는 자부심이 우리 세대에게는 있다"고 말했다. 그는 "난 아직 94세밖에 먹지 않았다. 살아있는 동지들과 평양에 가서 냉면 먹고 막걸리 한잔하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