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인의 땅의 歷史] 유학도 전쟁도 협상도 청은 일본에 참패했다

입력 2019.04.17 03:32 | 수정 2019.04.17 09:08

[161] 세상을 바꾼 서기 1543년 ⑪청나라 조기유학생 '유미유동(留美幼童)'과 청일전쟁

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

1867년 11월 9일 일본 도쿠가와 막부가 천황에게 통치권을 반납했다(대정봉환·大政奉還). 임진왜란 직후인 160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권력을 잡은 이래 267년 만이었다. 두 달 뒤 일본은 왕정 복고를 단행했다. 천황 메이지(明治)가 실질적인 일본 왕이 되었다. 아주 피비린내 나고 끔찍한 내전을 거쳐 1869년 7월 25일 반쯤 독립국이던 각 번(藩)은 토지와 백성을 천황에게 반납했다(판적봉환·版籍奉還). 또 숨 막히는 갈등이 벌어지고 1871년 8월 29일 메이지는 봉건 영주들의 영지인 261개 번을 행정단위로 격하하고 지사를 중앙에서 파견했다(폐번치현·廢藩置縣). 서기 1543년 철포(鐵砲)를 받아들인 이래 300년 넘게 진행해온 변혁 시리즈의 마지막 회였고 군국(軍國) 일본의 서막이었다. 전통적인 동아시아 맹주 중국과의 대결은 불가피했다. 일본은 이겼다. 중국은 참패했다.

1876년 이홍장과 모리의 대화

1875년 9월 20일 일본 군함 운요호가 조선 강화도 초지진을 포격했다. 개항을 하라는 무력 시위였다. 1854년 미국 페리 제독의 함포 사격으로 개항을 한 역사적 경험을 그대로 조선에 적용한 것이다.

이듬해 1월 24일 주중 일본공사 모리 아리노리(森有禮)와 청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이 천진에서 만났다. 목적은 조선의 청 속국 여부에 대한 담판이었다. 이홍장은 청 정부에서 개혁파에 속하는 거물이었다. 일본은 "전통적으로 중국에 조공을 바치는 조선이 독립국인가 속국인가"라고 물었고, 중국은 "내정은 간섭하지 않는다"고 밋밋하게 답했다. 그 순간 일본은 조선을 침략할 자유를 얻게 됐다.

두 사람은 다음 날 양국 개화에 관해 대화를 나눴다. 대화는 '모리 아리노리 전집(森有禮全集)' '두 번째 인터뷰(The Second Interview)'에 전문이 실려 있다.(周程, '중일 현대화 과정의 관념 충돌 일반', '安徽史學' 2017)

이홍장이 물었다. "왜 귀국은 서양 옷을 입는가." 모리가 대답했다. "옛날 옷은 놀기에 좋았지만 열심히 일하는 데는 절대 맞지 않는다. 우리는 가난하고 싶지 않다. 부자가 되기 위해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취했다." 이홍장이 반격했다. "의복 제도는 조상에 대한 존중 표시다. 만세 후대에 이어야 한다." 모리가 답했다. "조상이 살아 있어도 똑같이 했을 것이다. 천 년 전 조상들은 중국 옷이 당시 일본 옷보다 우월해서 중국 옷을 택했다. 다른 나라 장점이 보이면 일본은 어떻게든 배워서 따라 한다. 그게 일본의 미풍양속이다." 이홍장이 대답했다. "무기, 철도, 전신은 서양이 최고다. 하지만 제도는 개혁하지 않는다."

19년 뒤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두 나라 관리들이 재회했을 때에도 청 공무원은 변발을 하고 나타났고 일본 관리는 양복을 입고 등장했다. 근대화에 대한 시각은 매우 달랐고, 그 결과는 더 달랐다.

조기유학 프로젝트 '유미유동'

그때 미국에서는 청나라 학생들이 서양 기술을 배우고 있었다. 열두 살부터 열다섯 살까지 아이들이다. 이름은 '유미유동(留美幼童)'이다. 모두 120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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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8년 5월 18일 자 미국 ‘하퍼스 위클리’에 실린 청나라 미국 조기유학생 ‘유미유동(留美幼童)’의 수업 풍경(왼쪽). 변발을 한 학생들이 변발을 한 교사에게 꾸중을 듣는 장면이다. 교사가 펼친 책에는 ‘自由’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오른쪽은 시모노세키조약 회담장. 왼쪽 끝부터 시계 방향으로 나가타 다카요시 외무대신비서관, 이토 미요지 내각 서기관장, 무쓰 무네미쓰 외무대신, 이토 히로부미 전권변리대신, 이노우에 가쓰노스케 외무서기관, 오연방 일등참찬관, 나풍록 일등참찬관, 이홍장 전권대신, 이경방 전권대신, 마건충 일등참찬관, 무쓰 히로키치 통역관. 절대 다수가 유학파였다.

1860년 2차 아편전쟁 때 북경까지 서양 연합군에 털리고 난 뒤, 청에서는 이홍장 주도로 '양무(洋務) 운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제도는 그대로 두고(중체·中體) 기술만 수입하면(서용·西用) 부강해진다는 중체서용 논리였다. 1872년 청 정부는 일찌감치 자비로 미국 예일대 유학을 다녀온 용굉(容閎)의 상소를 받아들여 청소년 120명을 선발해 미국으로 보냈다. 이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군사, 철도, 전신 같은 중국 근대화에 필요한 기술 습득이었다. '총명하고 예의 바르고 용모 단정한' 소년 120명이 뽑혔다. 이름도 부르기 좋게 개명한 아이들은 똑같은 비단옷을 맞춰 입고 '부채를 쥐고 백로처럼 두 사람씩 짝을 지어' 줄 서서 증기선에 올랐다. 첫 출발은 1872년 8월 11일이었다.

4차에 걸쳐 30명씩 상하이에서 태평양을 건넌 이들은 미국 동부 코네티컷주 가정집에 배치돼 공부했다. 상류사회에서 하숙하며 명문고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은 차별받던 중국 이민자와 달리 쉽게 적응했다. 야구를 배웠고 교회를 다녔고 조정팀 조타수로 뛰었다. 이들은 15년 동안 중·고교 과정과 대학, 대학원 과정까지 끝내고 귀국할 예정이었다. 예일, 하버드, MIT와 컬럼비아, 렌셀러공과대 같은 명문대에 합격한 아이들도 40명이 넘었다.

그런데 10년 만인 1881년 청 정부는 유동들을 전격 소환하고 유학 프로젝트를 폐지해버렸다. 예일대 총장 노아 포터(Porter)가 "뛰어난 성취를 거두고 있는 훌륭한 아이들을 꺾지 말라"고 편지를 쓰고, 대통령 그랜트가 청원서를 보냈어도 소용없었다. 이유는 명쾌했다. '서화(西化)', 정신이 오랑캐로 변했다는 것이다.

감독관으로 파견됐던 오자등(吳子登)은 수시로 "학생들이 유가(儒家) 책을 읽지 않고 나쁜 습속에 물들었다"고 본국에 보고했다. 아이들은 매주 한 번씩 청 정부가 만든 유학 교과서 '성유광훈(聖諭廣訓)'를 외워야 했고 석 달에 한 번 감독관 앞에서 사상교육을 받아야 했다. 미국 지리, 피아노, 영시 작문 교육은 금지됐다. 결국 1881년 9월 9일 청 정부가 소환을 결정했다. 요절했거나 소환을 거부한 아이들을 제외하고 94명이 청으로 돌아왔다. 청 정부는 이들을 해군학교, 전신학교 등지로 임의 배치해 재교육을 시켰다. 10년을 허비한 것이다.

제국주의 열강에 의해 나라가 박처럼 쪼개지고 나서야(瓜分·과분) 청 정부는 제정신을 차렸다. 유동들은 청 정부가 제도 개혁을 시도한 1901년 광서 신정(新政) 이후에야 사회 중심에 등장했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청 지식인들은 "입헌(立憲)이 전제(專制)를 이겼다"고 주장했다. 전제로 낙인찍힌 정부는 그제야 입헌 개혁안을 내놨다. 늦었다. 1911년 청은 신해혁명으로 멸망했다. 썩어 문드러진 몸을 놔두고 화장으로 어떻게 해보려다 목숨을 잃고 만 것이다.

유학생의 전쟁 1편 청일전쟁

그사이 청은 청불전쟁(1884)과 청일전쟁(1894)을 겪었고 러일전쟁(1904)을 목격했다. 양무운동 기간 막강한 해군력을 확보한 청이었지만 서양 오랑캐 프랑스를 이길 수 없었고 서양 오랑캐를 그대로 학습한 일본을 앞설 수 없었다. 청불전쟁에는 해군학교를 나온 유동 6명이 참전했다. 이 가운데 4명이 전사했다.

1894년 7월 25일 조선 아산만 풍도 앞바다에서 청과 일본 군함들이 맞붙었다. 선전포고 없이 일본 군함이 불을 뿜었다. 동학농민혁명을 진압하겠다며 조선 국왕 고종이 청군을 불러들이자 함께 들어온 일본군이 터뜨린 전쟁이었다. 청일전쟁은 그야말로 유학생들의 전쟁터였다. 일본 사령관 쓰보이 고조(坪井航三)는 미국에서, 함장 가와하라 요이치(河原要一)는 독일, 또 다른 함장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와 사카모토 하치로타(阪元八郞太)는 영국과 러시아에서 해군학을 배운 유학생들이었다.

청나라 해군도 유학생이 지휘했다. 함장으로는 옥스퍼드 출신 임이중(林履中), 그리니치 왕립해군학교 졸업생 방백겸(方伯謙), 그리고 렌셀러공과대 중퇴생 유동 오경영(吳敬榮). 일등항해사 유동 진금규(陳金揆), 유동 심수창(沈壽昌), 부함장 유동 황조련(黃祖蓮), MIT 중퇴생 유동 송문홰(宋文翽). 어뢰팀장 서진붕(徐振鵬)도 예일대를 다니다 소환된 유동이었다. 이 청일전쟁에 유동 7명이 참전해 3명이 전사했다.(첸강, '유미유동', 시니북스 2005) 청은 패했다. 그 승패는 8개월 뒤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그대로 재현됐다.

유학생의 전쟁 2편 시모노세키 협상

1895년 3월 20일 시모노세키에 있는 요정 슌판로(春帆樓)에서 강화협상이 열렸다. 청 대표단은 청 전통 복식인 변발과 장포(長袍)를, 일본 대표단은 서양 복식을 했다. 첫날 회담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던 이홍장이 거리에서 얼굴에 권총 총격을 당했다. 조카 이경방(李慶芳)이 대리 전권대사를 맡았다. 일본 측 전권대사는 영국 유학파요 이와쿠라 사절단원이었고 독일에서 헌법을 공부한 이토 히로부미였다. 이토 옆에는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陸奧宗光·영국, 미국 유학), 내각 서기관장 이토 미요지(伊東已代治·유럽 헌법 연구), 외무 서기관 이노우에 가쓰노스케(井上勝之助·영국)와 통역관 무쓰 히로키치(陸奧廣吉·영국)가 배석했다. 이홍장 좌우에는 청나라 최초 프랑스 유학생 마건충(馬建忠), 영국 유학생인 청나라 첫 법학 박사 오연방(伍延芳)과 역시 영국 유학파인 나풍록(羅豊祿·각 일등참찬관)이 배석했다. 청은 조선이 독립국임을 인정하고 일본에 영토 할양과 배상금 2억 냥 지급을 합의했다. 오랑캐 땅에서, 오랑캐에게 수모를 당한 것이다. 얼굴에 붕대를 두르고 앉아 있던 이홍장은 틀림없이 그 이유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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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3월 20일 일본 시모노세키에 있는 요정 슌판로(春帆樓)에서 청일전쟁 강화협상이 열렸다. ?판로에는 ‘일청강화기념관’이 복원돼 있다. 사진 왼쪽 큰 의자가 청국 전권변리대신 이홍장이 앉았던 자리고, 그 맞은편이 일본 전권변리대신 이토 히로부미가 앉았던 자리다. 청일전쟁은 양국 유학파들이 치른 전쟁이었다. 양국 전투함 함장도 항해사도 미국과 영국과 프랑스와 독일 유학생들이었다. 강화회담 또한 유학생들의 전쟁이었다. 1868년 메이지유신 이전부터 대규모 유학단을 보냈던 일본은 서양 근대 제도를 수용했고 청은 ‘오랑캐의 습속’인 제도는 거부하고 ‘기술’만 받아들였다. 일본이 승리했다. 청일전쟁은 조선 땅과 바다에서 치러졌다. /박종인 기자

'유미유동' 이후 청일전쟁까지 청 정부가 보낸 유학생은 유럽 군사 유학생 94명 외에 단 한 명도 없었다.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 정부 유학생은 5년 만에 1000명이 넘었다.(허동현, '동아시아 제국의 개항과 근대국민국가의 수립과 좌절')

시모노세키에는 이날을 기념하는 '일청강화기념관'이 124년 전 모습 그대로 복원돼 있다. 기념관 건너 바닷가에는 2005년 세운 '조선통신사 상륙엄류지지(朝鮮通信使上陸淹留之地)' 기념비가 서 있다.

1874년 7월 16일 청 정부가 전문을 보내 "일본이 침략할 듯하니 미리 서양과 수교하라"고 권유했다.('동문휘고' 왜정·倭情) 조 선 조정은 "이미 병인양요, 신미양요로 서양의 장단점을 다 안다"며 필요 없다고 회답했다.(1874년 음 6월 25일 '승정원일기') 이듬해 일본 군함 운요호가 쏴대는 함포 사격에 조선 정부는 식겁하고 나라 문을 열었다. 시모노세키의 풍경은 그때 잉태됐다.

이제 조선 정치가들은 왜 식겁했고, 일본 정치가는 조선 정부를 어떻게 식겁하게 만들었나 알아볼 차례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4/17/201904170030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