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광복20년'에서 2010년 '프레지던트'로

한국의 정치 드라마 어제와 오늘

홍주희 | 제154호 | 20100220 입력 블로그 바로가기
한국 정치 드라마의 시작은 라디오였다. 1967년 TBC는 ‘광복20년’을, 70년 동아방송은 ‘정계야화’를 방송했다. 8·15부터 5·16까지 주요 사건을 담은 ‘광복20년’은 10년간 방송됐다. 거창 양민 학살, 남북 협상, 장면 부통령 저격 등 역사의 재연은 시청자를 라디오 앞으로 끌어당겼다. ‘정계야화’는 세 차례나 중단되는 우여곡절 끝에 동아방송 통폐합과 함께 막을 내렸다. 김구·여운형·이승만 등 거물 정치인이 등장하고 정치 이면을 뉴스처럼 재생한 라디오 드라마는 청취자의 상상력을 키웠다.

민주화는 TV시대에 라디오 정치 드라마를 부활시켰다. 지난해 21년 만에 막을 내린 MBC의 ‘격동 50년'이다. 88년 ‘격동 30년’으로 첫 전파를 탄 이 프로는 극의 소재인 정치사의 범위가 확대되면서 99년 제목을 바꿨다. 4·19로 시작한 드라마는 16대 총선과 낙선·낙천 운동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옷 로비 사건, 햇볕정책의 빛과 그림자도 다뤄졌다. 당사자들로부터 항의도 따랐지만 의외의 결과도 있었다. 7년2개월 동안 연출을 맡은 오성수 PD는 “90년대 중반 5공을 비판하는 방송이 나갔는데 5공을 단죄하는 당시 분위기 탓인지 당사자들의 항의가 거의 없었다”고 했다. 지난해 초 ‘참여정부의 도전과 위기’편이 나가자 봉하마을로부터 녹음본을 보내달라는 요청이 오기도 했다. 하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로 테이프는 전달되지 못했다. 오 PD는 “라디오 드라마는 한 번 시작하면 10년, 20년씩 이어져 노하우가 쌓인다”며 “TV만 한 반향은 없지만 한 사건을 2~3개월씩 긴 호흡으로 다루는 라디오 정치 드라마에 더 깊이가 있다”고 했다.

이덕화 카리스마 연기...'전두환 미화' 논란
1970년 MBC에서 방송된 ‘박 마리아’는 이기붕 부통령의 부인인 박 마리아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통해 권력을 조명하는 드라마였다. 당시 신예였던 윤여정씨가 박마리아 역을 맡았다. “권력의 비극을 통해 정치인이 구태를 반복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의지로 시작했지만 결국 중단됐다.본격적인 TV 정치 드라마의 시대를 연 ‘제1공화국’이 제작된 건 81년이었다. 다큐멘터리의 객관성에 드라마의 극적 재미를 더한 형식이었다. MBC PD 시절 ‘제1공화국’을 연출한 고석만 전 문화콘텐츠진흥원장은 “다큐멘터리 정치 드라마는 한국에만 있는 드라마 포맷”이라며 “방송의 힘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여간첩 김수임’편이 문제가 돼 PD가 안기부에 불려가는 등 고초를 겪었다.

2005년 MBC에서 ‘제5공화국’까지 만드는 사이 SBS는 ‘코리아게이트’(95)와 ‘3김시대’(98)를 방영했다. ‘공화국 시리즈’가 시대별 사건을 중심으로 한 드라마였다면 이 둘은 박동선과 김영삼(YS)·김대중(DJ) 전 대통령, 김종필(JP) 전 총리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현대사를 풀어냈다. 한국 현대사를 사실에 기대 조명한 이런 다큐멘터리 정치 드라마는 ‘정치 실록’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역사의 재연이 드라마의 핵심이다 보니 캐스팅을 둘러싼 잡음은 늘 따랐다. ‘제4공화국’에는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YS)이 극에 등장했다.

여러 배우에게 YS 역할을 제의했지만 고사하는 바람에 수십 번에 걸친 설득 끝에 ‘점잖은 교회 집사’인 임동진씨가 YS로 출연했다. 해석과 고증을 둘러싼 논쟁도 이어졌다. 특히 등장 인물 대다수가 생존해 있을 때 방영된 ‘제5공화국’은 시작 전부터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이덕화씨의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가 '미화' 논란을 불렀고, 허화평·장세동씨 등 5공 실력자들은 대본 수정과 반론 보도를 요구했다. 또 박철언 전 의원은 ‘수지 김 간첩 조작’ 사건과 관련, 허위 사실을 방송해 자신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제작진을 상대로 10억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대물'주인공은 미실 고현정
신군부 출발과 함께 한국 현대사에 카메라를 들이댄 다큐 정치 드라마는 논란과 외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드라마는 다른 방식으로 정치를 소재 삼았다. 사실에 상상력을 더하거나 극적 요소를 가미하는 형식이었다. ‘신(新)용비어천가’는 89년 MBC ‘베스트셀러극장’에서 방영된 단막극이다. 80년 신군부 집권 과정에서 언론이 취한 태도를 극화해 권력과 언론의 관계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했다. 소설가 현길원씨의 동명 소설을 당시 서울대 복학생이던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각색했다.

국난을 타개할 영도자로 대통령을 띄우기 위한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가상의 서울방송’이 배경이다. 보도국장·정치부장과 ‘신용비어천가’ 제작을 맡은 기자의 갈등이 주요 내용이다. 유 전 장관은 “돈을 벌기 위해 여러 곳에 글을 쓰던 때라 드라마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고 했지만 여파는 적지 않았다. 방영 석 달 뒤 ‘베스트셀러극장’이 폐지됐다. 권-언 유착을 다룬 ‘괘씸죄’ 때문이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지난해 방송된 ‘시티홀’은 이상적인 지도자를 보여주는 ‘정치 판타지’에 가깝다.

가상의 도시 ‘인주시’를 배경으로 해고된 10급 공무원(신미래)이 시장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고 시민을 위한 시정을 펼치는 모습을 그렸다. 제작진은 “정치는 소재일 뿐, 로맨틱 코미디”라고 강조했지만 드라마는 곳곳에 현실 정치의 모습을 심고 속 시원하게 꼬집었다. 시민들은 공금을 유용한 전 시장을 욕하면서도 뽑고, 학연·지연으로 표를 준다. “정치란 정당끼리 치고받고 싸우는 것”이라던 신미래의 대사는 정치에 대한 일반국민의 생각을 대변했다. ‘시티홀’은 “지나치게 희화화했다”는 지적이 있었지만 새로운 갈래의 정치 드라마가 됐다.

문화평론가 이영미씨는 “기존의 정치 드라마는 라디오 스타일을 TV로 옮겨온 ‘다큐스러운’ 드라마였지만 점차 ‘드라마스러운’ 드라마가 등장했다”며 “6월 항쟁과 문민정부의 출범 등 시대적 변화에 따라 정치를 도구 삼아 극 안에서 놀 수 있는 여유가 조금씩 생긴 것”이라고 설명했다.

참여정부 시절, 유독 정조 등장한 사극 많아
사극의 변화는 정치 드라마의 변화와 시기적으로 맞물려있다. ‘공화국 시리즈’의 시대엔 사극 역시 실록을 바탕으로 역사를 고증한 ‘조선왕조 오백년’이 주였다. 하지만 허구를 바탕으로 한 정치 드라마가 등장하면서 사극도 달라졌다. 참여정부 시절엔 조선 제22대 왕인 정조가 등장한 사극이 유독 많았다. 2004년 유홍준 당시 문화재청장이 노무현 전 대통령 앞에서 “노 대통령은 정조와 비슷하다”고 한 이후의 일이다.

KBS의 ‘한성별곡’, MBC의 ‘이산’, 케이블 CGV 채널의 ‘정조 암살 미스터리-8일’ 등 2007년 제작된 사극에 정조가 나왔다. 특히 ‘한성별곡’에서는 “이쯤 되면 막가자는 것이냐” “임금이 임금으로서 하고자 하는 일을 무조건 좌초시키고 보는 불순한 세력”이라는 정조의 대사가 나왔다. 노 전 대통령의 발언과 매우 흡사하다. 그 때문에 “현 정권을 옹호하는 것 아니냐”, “공영방송이 오해할 만한 내용을 내보내나”라는 시청자 비판이 이어졌다. 현대극이 다루지 못하는 정치를 사극이란 틀로 대신 다루는 역할을 한 셈이다.

2007년 방영된 ‘주몽’에서는 부여와 한나라의 갈등이 북한과 미국의 그것과 흡사하다는 해석이 있었다. 국력을 키우기 위해 강철 검을 개발하려는 부여에 대해 한나라가 소금 거래를 막는 등 제재를 가하는 것이 논란이 됐다. 북한의 핵 개발을 저지하기 위한 미국의 경제 제재와 닮은꼴이란 말도 나왔다.

지난해 ‘선덕여왕’에서는 난장판이 된 화백회의의 모습에서 미디어법 국회 통과 현장이 떠올랐다는 시청자가 많았다. ‘선덕여왕’의 박상연 작가는 “그걸 의식하고 쓴 게 아니다”라고 못 박았다. 그러면서도 그는"의도했든 아니든 간에 왕조를 다루는 드라마에서는 작가가 현실에서 보고 느낀 걸 반영하게 된다"고 말했다.

대통령이 드라마 주인공으로 등장
올해는 정치 권력의 정점에 선 대통령을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 두 편이 새로 선보인다. 하반기 방영 예정인 ‘프레지던트’는 본격 정치 드라마를 표방했다. 제작을 맡은 필림이지엔터테인먼트 류시형 대표는 “가상의 이야기지만 한국 현대사를 지나온 50대 남성을 통해 대통령 선거 과정을 생생하게 그려내겠다”고 했다. 주인공은 유신 반대운동으로 투옥되고 ‘대한민국을 바꾸겠다’는 신념으로 정치에 뛰어들었다. 치열한 경선을 거치고 음모와 술수를 넘어선 끝에 대통령에 당선된다는 것이 드라마의 큰 줄기다.

주요 등장 인물은 선거 캠프의 전략 보좌관, 홍보 보좌관, 선거 컨설턴트, 수행비서, 여당의 원내대표 같은 정치권의 직함을 갖고 있다. 류 대표는 “제목은 ‘프레지던트(대통령)’지만 드라마의 방점은 ‘프레지던시(대통령직)’에 찍혀 있다”며 “정치 시스템을 통해 정치와 권력 투쟁이 혐오의 대상이 아닌 선(善)을 지향하는 치열함의 산물임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또 “드라마 속의 선거 과정을 통해 이상적인 리더상을 시청자에게 보여주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대물’에는 한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등장한다고 해 화제다. 고현정씨가 주인공인 서혜림 역을 맡았다. 열혈 여검사 서혜림은 정치 폭력조직의 배후인 거물을 구속한 책임을 지고 사표를 던진 뒤 인권변호사가 된다. 그리고 사회악에 맞서 쌓은 명성으로 대권에 도전해 대통령에 당선된다는 내용이다. ‘쩐의 전쟁’을 쓴 박인권 작가의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했다. 하지만 ‘대물’ 외주제작사인 이김프로덕션 측은 ‘대물’이 정치 드라마로 비춰지는 것을 경계했다. 프로덕션 관계자는 “우리는 원작대로 갈 뿐이지 본격 정치 드라마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한국 정치 드라마가 넘어야 할 산은
한국 정치 드라마는 과거에 비해 훨씬 다채로워졌다. “감히 정치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없던 시기가 지나고 허구로 정치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시대가 됐다”는 것이 이영미씨의 설명이다. ‘모래시계’ ‘변호사들’ 등 정경유착이나 사회적 문제를 이야기로 풀어낸 드라마가 나온 것도 90년대 이후였다. 드라마가 외압에 의해 중단되는 건 상상하기 어려워졌다. 드라마의 다양화는 시대 변화에 따른 결과물이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제작자들은 정치인은 물론 시청자가 정치 드라마를 받아들이는 인식은 여전히 부족하다고 입을 모은다. 정치가 주요 소재인 드라마를 만들면서도 “정치 드라마가 절대 아니다”라고 부정하는 것이 바로 그 한계를 증명한다는 지적이다. “달을 가리키는 데 손가락만 본다”는 고석만 전 문화콘텐츠진흥원장의 말처럼 자의적 해석으로 드라마를 정의해버리는 탓이다.

그는 "정치드라마에 대한 안목이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제6공화국'이 만들어져도 온전하게 나올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며 "이런 것까지 극복해야 좋은 드라마도 나온다' 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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