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01.01(목) 03:03 / 종합 A6면

[1] 1945년 8월 15일 그날

항복·패전이란 단어 안나와
첫날은 광복인지 어리둥절… 16일 되어서야 '태극기 만세'
행복의 물결 온나라 뒤덮어

日 전쟁중 철저히 언론통제… 국민, 포츠담선언 뭔지몰라
조선총독은 9월 9일까지 여전히 조선총독으로 행동


전봉관 KAIST 인문사회학과 교수
     전봉관 KAIST 인문사회학과 교수

1945년 광복 이후 70년, 대한민국은 격동의 역사를 숨 가쁘게 달려왔다. 좌우 대립과 전쟁, 산업화와 민주화에 이르는 길에서 때로는 고통에 힘겨워하고 스스로 이룬 놀라운 성취에 감격하기도 했다. 지난 역사를 되돌아보는 일은 미래로 가는 길을 모색하기 위한 것이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70년을 성찰적으로 짚어보는 시리즈를 각 분야 전문가들과 함께 매주 연재한다.


"포항에서 병원을 운영하던 남편은 병원 문을 모두 걸어 잠그고는 조그마한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켜고 방송을 들으라고 했어요. 일왕이 벌벌 떨면서 항복 선언을 하는데, 그 방송을 처음부터 끝까지 들었던 겁니다. 일왕의 방송이 끝나자 이어서 한국말 방송이 나왔어요. '우리는 해방이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만세!' 라디오에서 우렁찬 목소리로 전 국민을 향해 소리쳤어요."

현재 한국인들이 간직한 해방 당일의 이미지는 수필가 전숙희(1919~2010)의 증언과 비슷할 것이다. 하지만 이 증언의 몇몇 대목은 역사적 사실에 어긋난다. 전날 밤부터 당일 아침까지 수차에 걸쳐 일왕 방송 예고가 있었으므로 굳이 문을 걸어 잠그고 방송을 들을 이유가 없었다. 트랜지스터가 발명된 것은 그로부터 2년 후인 1947년이었다. 결정적으로 그날 라디오에서 '해방' '대한민국 만세' 같은 말은 방송되지 않았다.

이처럼 기억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흐릿해지거나 왜곡되고 엇갈리게 마련이다. 독립운동가 박진목은 8·15 당일 "대구 시내가 태극기를 들고 나와서 만세를 부르고 울고불고하는 사람들로 야단"이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같은 대구 출신 노동운동가 이일재는 "1945년 8월 16일 예정대로 일본 군대에 입대"해서 "이틀 뒤 일본군이 모두 퇴각해 18일에야 집으로 돌아왔다"고 증언했다. 만일 8·15 당일 태극기가 휘날리고 만세 소리가 높았다면, 다음 날 선량한 대구 청년이 일본 군대에 입대하는 역설적인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역사학자들은 대체로 8·15 당일은 어리둥절한 채로 특별한 사건 없이 지나갔고, 만세 인파가 해방의 환희에 젖어 거리로 본격적으로 쏟아져 나온 것은 이튿날인 16일부터라고 의견을 모은다. 서울 주재 소련 총영사관 부영사의 아내로 8·15 전후 서울에 있었던 파냐 샤브쉬나의 기록도 이를 뒷받침한다.

8·15 첫 一聲.
(왼쪽)8월 15일 도쿄 - 1945년 8월 15일 폐허가 된 일본 도쿄 시내에서 히로히토 일왕의 라디오 방송을 듣는 시민들. (오른쪽)8월 16일 서울 - 1945년 일제의 항복 소식을 듣고 거리로 나와 환호하는 서울 시민들. 8월 16일 서대문형무소 앞에서 촬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왼쪽)8월 15일 도쿄 - 1945년 8월 15일 폐허가 된 일본 도쿄 시내에서 히로히토 일왕의 라디오 방송을 듣는 시민들. (오른쪽)8월 16일 서울 - 1945년 일제의 항복 소식을 듣고 거리로 나와 환호하는 서울 시민들. 8월 16일 서대문형무소 앞에서 촬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일보 DB
"8월 15일의 서울은 마치 쥐 죽은 듯했다. 물론 주민들은 일본의 항복을 알고 있었으나 많은 사람이 믿지 않았다. 그냥 기다렸다. 조심스러운 기쁨과 희망을 가지고. 그런데 그 바로 다음 날 모든 것이 바뀌었다. 거세고 억제할 수 없는 행복의 물결. 그 물결은 말 그대로 시내와 온 나라를 뒤덮었다."

일본의 패전은 15일 정오 조선·일본·대만 등에 방송된 일왕의 육성 방송인 이른바 '옥음방송(玉音放送)'을 통해 알려졌다. 1940년 조선의 라디오 유료 청취자 수는 22만7573명이었다. 여러 사람이 라디오 하나에 모여서 '옥음방송'을 들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단지 청취자가 적어서 해방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전쟁 기간 내내 일제 군부는 철저히 언론을 통제했다. 조선 독립을 명시한 1943년 11월 카이로회담이나 일본에 무조건 항복을 요구한 1945년 7월 포츠담선언은 당연히 보도되지 않았다. 8월 6일 히로시마,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돼 수십만명이 희생되었을 때조차 미군의 '신형폭탄' 투하로 무구한 양민이 희생되었다는 정도로만 보도됐다.

이러한 언론 통제 탓에 대부분의 일본인과 조선인은 패전 임박을 예상할 수 없었다. 15일 일왕의 '옥음방송'이 항복 선언일 것으로 예상했던 사람도 얼마 되지 않았다. 경성방송국 일본인 직원들조차 천황의 중대 발표가 소련에 대한 선전포고일 것으로 짐작했을 정도였다.  
               
4분 37초 동안의 '옥음방송'은 잡음이 심해서 알아듣기 어려웠다. 난해한 한문 투의 문장은 일본인도 한 번 들어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천황의 육성 방송 직후 일본인 아나운서가 종전 조서를 다시 한 번 낭독했고, 이덕근 아나운서가 한국어로 번역한 원고를 낭독해 대강의 '개요'는 청취자들이 이해할 수 있었다.

"짐은 제국 정부로 하여금 미·영·중·소 4개국에 그 공동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토록 하였다."

소위 '무조건 항복 선언'이었다. 하지만 '종전 조서' 어느 곳에도 패전·항복·해방·독립 같은 단어는 없었다. 이 구절이 '무조건 항복 선언'으로 해석되는 것은 천황이 수락하기로 한 포츠담선언이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포츠담선언의 내용은 이튿날인 16일자 신문에야 최초로 게재되었다. 포츠담선언의 내용을 알지 못한 채 종전 조서를 읽고 해석해봐야 전쟁이 끝났다는 것을 짐작하기란 쉽지 않았다.

'옥음방송' 직후 배포된 매일신보에는 천황의 종전 조서와 함께 당시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의 유고(諭告)가 게재됐다. 아베 총독은 소위 '일본과 조선은 한 몸'이라는 '내선일체(內鮮一體)'를 강조하면서 유언비어 유포와 동포 상잔(相殘)을 경계하라고 당부했다. 9월 9일 미군 사령관 하지 중장에게 정식으로 항복할 때까지 아베는 여전히 조선총독이었고, 총독으로 행동했다.

전쟁은 끝났지만 일본이 패망한 것도 같기도 하고 아닌 것도 같고, 조선이 해방된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아 어리둥절하기만 했던 날. 그날이 1945년 8월 15일이었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