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인의 땅의 歷史] "이들이 일본의 보물을 만들 것이다"

입력 2019.03.27 03:01

[158] 세상을 바꾼 서기 1543년 ⑨ 무본억말(務本抑末)과 조선 도공·上

박종인의 땅의 歷史
〈지금까지 이야기〉

서기 1543년에 세 가지 일이 벌어졌다. 폴란드 신부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발표했다. 일본은 포르투갈로부터 철포를 수입해 국산화했다. 조선은 성리학 교육기관인 서원(書院)을 설립했다.

이보다 100년 전 조선은 세종 때 조공 폐해 방지를 명분으로 전국 금·은광을 폐쇄했다. 이어 1526년 일본에서 세계 최대 은광 이와미 은산이 발견됐다. 1533년 조선 기술자 2명이 은 제련법인 회취법을 이와미에 전수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 은으로 철포를 대량생산해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전쟁 직전 왜인이 철포 헌상을 제안했다. 조선 정부는 거부했다.

1641년 일본은 네덜란드에 독점무역권을 허용했다. 일본은 최신 유럽 정보와 학문을 전수받아 '난가쿠(蘭學)'를 발전시켰다. 조선은 쇄국을 유지하며 성리학적 정치, 사회, 경제를 다져 나갔다. 전후 조선통신사들은 일본을 문명을 모르는 오랑캐로 비하했다. 일본은 조선을 성리학과 중국밖에 모르는 오만한 나라라 비난했다. 정조는 성리학 외 학문을 이단으로 통제했다. 통신사들은 에도(江戶)의 부귀영화를 '오랑캐에게 맞지 않은 사치'라고 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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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 마을인 일본 사가현 아리타(有田)에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서 끌려간 사기장 이삼평(李參平)을 기리는 신사가 있다. '도잔신사(陶山神社)'다. 신사 정문인 도리이(鳥居)는 청화백자로 만들었다. 이삼평은 1616년 아리타에서 자기 원료인 백자토를 발견해 일본에서 처음으로 백자를 만들었다. 1917년 아리타 주민회는 이삼평을 일본 백자의 도조(陶祖)로 인정하고 신사 위 산꼭대기에 기념비를 세웠다. 훗날 와세다 대학을 세운 사가번 출신 거물 정치가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가 후원했다. 사람들은 이후 그의 일본 이름 '가나가에 산베이(金江三兵衛)'에서 유추해 그를 '이삼평(李參平)'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납치된 도공들은 지역 영주의 엄격한 통제와 풍족한 경제·사회적 지원을 받으며 자기를 생산했다. /박종인 기자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도공 이삼평(李參平)은 사가번 아리타(有田)에 살다 죽었다. 아리타에는 그를 기리는 신사가 있다. '도잔신사(陶山神社)'다. 신사 정문인 도리이(鳥居)는 청화백자로 만들었다. 아리타는 도자기 마을이다. 신사 주신은 하치만(八幡神)이고 좌우 배신은 이삼평과 임진왜란에 참전한 사가번 번주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다.

1716년 사가번 무사 야마모토 조초(山本常朝)가 구술한 말을 기록한 책 '하가쿠레(葉隱)'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나오시게가) 일본의 보물을 만들기 위해 유능한 도공 예닐곱을 데려왔다(日本の寶になさるべくと候て燒物上手頭六七人召連れられ候)."('하가쿠레' 3권, 노성환, '일본 사가현 아리타의 조선 도공에 관한 일고찰', 2009) 보물, 그리고 함께 신이 된 납치범과 희생자. 자, 이 모순된 풍경화 감상법이다.

3만8717명의 귀, 산 사람 80명

1598년 10월 말 사쓰마번 번주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부대 귀국선에는 3만8717명의 귀(耳)와 조선인 80여 명이 실려 있었다.('地理纂考·지리찬고', 정광, '일본 소재 한국학자료의 현황과 활용 방안', 2005)

납치된 백성이 흘러넘치자 선조는 "우리 백성은 (명나라) 천자의 적자(天子之赤子)"라며 쇄환을 명했다.(1607년 1월 4일 '선조실록') 귀국한 포로는 5667명에 불과했다.(손승철, '조선통신사의 피로인 쇄환과 그 한계, 2012) 나머지 10만(3만이라고도 하고 8만이라고도 한다) 가운데에는 도공, 조선 사기장들이 있었다.

신(神)이 된 조선의 도공

일본
사가번 번주 나베시마 나오시게는 '일본의 보물을 만들기 위해' 도공을 끌고 왔다. 보물은 백자(白磁)다. 기술자는 납치했다. 그런데 흙이 없었다. 1300도 고온을 견딜 수 있고, 철분 없는 순백(純白)의 자석(磁石)이 필요했다. 조선인 이삼평이 이즈미야마(泉山)에서 백자토를 발견했다. 나오시게는 가네가에(金江)라는 성을 주고 그를 하녀와 결혼시켰다. 1616년이다.('다쿠가와고문서·多久家古文書', 노성환, '일본 아리타의 조선 도공 이참평에 관한 연구', 2014) 1637년 나베시마 가문은 아리타에 몰려온 일본인 도공 826명을 추방했다. 이삼평은 독점 생산권을 가진 무사가 되었다.('山本神右衛門重澄年譜', 노성환, 2014) 아리타 백자는 인근 이마리(伊萬里)항을 통해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사가번은 부자가 됐다.

1828년 아리타는 새로 지은 신사를 '도잔신사(陶山神社)'라 명명하고 이삼평을 주신인 하치만 옆에 모셨다. 이삼평을 끌고 온 나오시게도 함께 모셨다. 1888년 신사 정문인 도리이(鳥居)도 청화백자로 만들어 세웠다. 1917년 아리타 주민들은 신사 위 연화석산(蓮花石山) 정상에 '도조 이삼평 비'를 세웠다.(노성환, 2014) 훗날 와세다대학을 만든 사가번 출신 거물 정치가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가 후원회 명예총재였다. 일본 요업계는 이삼평이 백자토를 발견한 1616년을 일본 백자의 원년(元年)으로 삼고 있다. 비를 세울 때 사람들은 그의 일본명 '가나가에 산베이(金江三兵衛)'에서 유추해 그를'이삼평(李參平)'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조슈번 번주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 또한 도공들을 끌고 갔다. 이들은 복잡한 과정을 거쳐 현 야마구치현 하기(萩)에 정착했다. 원조는 이작광과 이경이다. 이작광은 히로시마에서 활동했고 이경은 하기에 정착해 '하기야키(萩燒)'의 원조가 됐다. 이작광은 분쟁 끝에 살해됐다고 전하고 이경은 사카모토 고라이자에몬(坂本高麗左衛門)이라는 이름과 무사 신분을 받았다. 하기에는 이경, 이작광 외에 다섯 명이 더 활동했다.

가고시마를 지배했던 사쓰마번 번주 시마즈 요시히로는 스물두 성씨 남녀 80여 명을 끌고 와 나에시로가와(苗代川)로 집단 이주시켰다. 현 가고시마 미야마(美山)다. 1614년 조선인 박평의가 백토를 발견했다. 아리타 백토처럼 순백은 아니었지만 이 또한 사쓰마 자기의 원조가 됐다. 이후 나에시로가와 도공들은 무사 신분을 받고 대대로 다양한 종류의 그릇을 구워냈다. 여기까지 '만리타향에서 역경을 딛고 업을 이룬 선조의 혼(魂)'이야기였다. 이제부터 결이 다른 이야기다.

굶어죽은 39명의 도공

종전 20년 뒤 광해군은 지방 관리 박우남이 올린 화준(畵樽·꽃병) 두 개로 국빈 잔치를 치렀다. 둘 다 뚜껑이 없고 하나는 주둥이가 부서져 있었다.(1618년 윤4월 3일 '광해군일기') 값비싼 청화백자는 포기하고 철분이든 석간주 유약을 쓴 철화백자를 만들다가(1634년 5월 18일 '승정원일기') 2년간 백자 생산을 금지하기도 했다.(1637년 윤4월18일 '승정원일기' 등)

숙종 대에 부산 초량왜관에는 대마도가 설립한 전용 가마 '부산요'가 운영 중이었다. 동래부는 해마다 흙과 땔감과 조선 도공을 부산요에 공급했다. 1681년 공급한 백토는 500섬(171t)이었다.('왜인구청등록', 권상인, '왜관요에 관한 소고', 2016) 1707년에는 조선 도공 5명을 순차로 상주시키기도 했다.('館每日記·관매일기', 조국영, '조선 후기 왜관 내 부산요에서 활동했던 양산 도공과 그 역할', 2016) 기술자도 있었고 재료도 여유가 생긴 것이다. 그 태평성대에 이런 기록이 나온다. '도자기 굽는 분원에서 굶어 죽은 자가 39명이나 된다(院下飢死者已至三十九名云)'(1697년 윤3월 6일 '승정원일기') 왜 기술자들이 굶어 죽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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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잔신사가 있는 아리타 연화석산(蓮花石山) 꼭대기 '도조 이삼평비'(왼쪽). 가운데는 18세기 나가사키 데지마를 통해 유럽으로 수출된 아리타 도자기. 알파벳 'A'가 그려져 있다. 오른쪽은 조슈 하기에 끌려간 1대 사카고라이자에몬(坂高麗佐衛門) 이경(李敬)의 작품.
1724년 즉위한 영조는 사치를 금하고 술을 금했다.(1726년 영조실록 2년 10월 13일) 금지령은 재위 내내 실시됐다. 후임 정조는 이렇게 말했다. "농사에 힘쓰고 상업을 억제하여 이익 된 일을 일으키고 해되는 일을 제거한다(務本抑末 興利除害)."(1783년 1월 1일 '정조실록') 분원에서 '기묘하게 기교를 부려 제작한 것들(奇巧制樣)'이 보고되자 정조는 '쓸데없고 긴요하지 않은 것은 일체 만들지 말도록 엄금하라(屬於無用不緊者 一切嚴禁)'고 명했다.(1795년 8월 6일 '정조실록')

돌아오지 않은 도공들

상품은 만들지도 말고 팔지도 말라. 농업만 중시하는 이 '무본억말(務本抑末)'이 오랑캐에게는 500섬씩 흙을 퍼다주고 천민 도공 39명을 굶어죽게 만든 본질적인 이유다. 국내시장은 정책적으로 억제됐다. 천시된 생산은 천민이 맡았다. 아니, 금주령을 내리고 본인은 송절차를 마시고 취한 영조(성대중, '청성잡기')와 '책가도(冊架圖)' 병풍에 청나라와 일본 채색자기를 잔뜩 그려넣은 정조의 위선이 원인인지도 모른다.

천대 속에 아사(餓死)할 것인가, 아니면 무사로서 인생을 향유할 것인가. 하기에 끌려간 도공 이작광은 조선으로 돌아가 동생 이경을 데려갔다.(이작광 4대손 작성 '傳記', 노성환, '일본 하기의 조선도공에 관한 일고찰', 2009) 사쓰마에 끌려갔던 도공 존계(尊階)는 조선으로 돌아가 도공들을 더 데리고 일본으로 갔다.(우관호 등, '아가노, 다카도리 도자기 연구', 2000)

일본 자기의 혁신과 나베시마의 보물

1644년 히가시지마토쿠에몬(東島德右衛門)이라는 아리타 상인이 나가사키에서 중국인 주진관(周辰官)에게 거액을 주고 붉은 염료법 '아카에(赤繪)'를 배웠다. (森淳, '이삼평과 아리타백자의 발전', 1992) 명과 청이 국경을 닫은 사이, 독점 무역권을 가지고 있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아리타 자기를 유럽으로 가져갔다. 청나라 청화백자밖에 몰랐던 유럽 부자들이 울긋불긋 화려한 아리타 자기를 대량 주문했다. 끝이 아니었다.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사가번과 사쓰마번이 자기를 출품했다. 아리타 자기가 박람회 대상을 탔다. 화려하고 큰 일본 자기에 유럽 시장이 활짝 열렸다. 유럽에 자포니즘(japonisme)이 불었다. 이 또한 끝이 아니었다. 사가번은 독일 과학자 고트프리트 바그너를 자기 기술 고문으로 초빙했다. 아리타 자기는 1873년 빈 만국박람회에서도 대상을 수상했다. 사가번은 도예가 3명을 독일로 유학시켰다.(阿久津マリ子, '19세기 후반 이마리요 생산에 유럽이 미친 영향', 2009) 조선은 유럽 시장을 알 턱 없었고, 알려 하지도 않았다.

뿌리는 폭력적으로 끌고 간 조선 도공이 내렸으나, 이후 일본을 자기 명가로 만든 동력은 이 혁신이었다. 일본 다인들이 "흙과 기술은 조선 것이고 오로지 불만 일본 것(히바카리·ひばかり)"이라며 좋아했던 초기 조선 스타일은 완전히 사라졌다. 이제 끝났는가.

아리타의 역사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 대포도 군함도 우리 아리타 자기가 가져다준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불꽃의 마을 아리타의 역사 이야기', 1996) 대포? 군함? "일본의 보물이 되리라"고 한 예언, 아직 끝나지 않았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3/27/201903270005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