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인의 땅의 歷史] 인공섬 데지마에서 일본은 근대를 배웠다

입력 2019.03.06 03:01 | 수정 2019.03.06 10:10

[155] 세상을 바꾼 서기 1543년 ⑧성리학과 난가쿠(蘭學)·上

박종인의 땅의 歷史

하멜의 추억

1666년 9월 4일 억류 생활 13년 만에 조선을 탈출한 하멜 일행은 사흘 만에 일본 규슈 북서쪽 작은 섬 히라도(平戶島)에 도착했다. "풀이나 뜯는 노예로 사느니 죽는 게 낫다"며 감행한 탈출이었다. 10월 25일 나가사키로 이동한 하멜은 일본인 관리로부터 혹독한 심문을 받았다. 질문번호46번이다. "왕은 왜 당신을 보내주지 않았나?" "왕은 조선이 다른 나라에 알려지기를 원치 않기에 외국인을 결코 보내지 않는다고 했다." 설명이 이어졌다. "조선인은전세계에 나라가 12개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옛 기록에 나라가 8만4000개라고 적혀 있지만 태양이 한나절 동안 그렇게 많은 나라를 다 비출 수 없기 때문에 지어낸 얘기라고들 했다."('하멜표류기') 3년 뒤 나가사키에 있던 네덜란드 상관(商館·무역사무소)이 바타비아(자카르타) 네덜란드 총독부에 보고했다. "조선은 가난한 데다 교역을 원치 않는다. 항구도 없다. 일본과 중국 또한 우리와 조선의 교역을 원치 않는다."(1669년 10월 5일 나가사키 상관이 바타비아 총독에게 보내는 서한)

그해 12월 10일 네덜란드에서 건조한 '코리아호(jaght Corea)'가 바타비아에 입항했다. 선박명이 '코리아'라면 조선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코리아호는 조선과 무관하게 사용돼다가 10년 뒤 경매로 매각됐다.(헤니 사브나이에 Henny Savenije, '하멜 이전의 네덜란드와 영국의 통상 시도 및 하멜의 조선 체류', 2002) 자, 하멜이 심문받은 그 섬, 데지마(出島) 이야기다.

해적의 시대, 쇄국의 시대

1494년 6월 7일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지구를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반씩 나눠줬다. 토르데시야스 조약이라는 이 허황된 조약을 통해 두 나라는 지구의 동반구와 서반구를 신으로부터 물려받았다. 신이 허락한 대항해시대가 개막했다. 식민지 전쟁이 불붙었다. 1581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네덜란드와 영국이 뒤를 이었다. 식민지 개척보다는 식민지 금은보화를 실은 상선 약탈이 쉬웠다. 바다에는 해적 떼가 들끓었다. 그사이 동아시아 3국, 중국과 조선과 일본은 나라 문을 걸어 잠갔다. 명은 동아시아 바다에 들끓던 해적이 골치였다. 조선은 명·청에만 문을 열었다.

이미지 크게보기
일본 나가사키현 나가사키에 있었던 인공 섬 데지마(出島)는 에도시대 세계를 향해 열린 문이었다. 네덜란드는 이 작은 섬에 무역사무소를 만들고 일본과 교역을 했다. 조선이 1%의 가능성도 열어놓지 않고 국가를 완전히 닫은 데 반해, 에도막부는 쇄국정책 속에서도 데지마만은 네덜란드와의 교역을 위해 열어놓았다. 17세기부터 19세기 중엽까지 일본 지식사회와 권력층은 데지마를 통해 세계를 파악하고 근대 문물을 받아들였다. 사진은 데지마 네덜란드 상관의 상관장 집무실이다. /박종인 기자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권력을 잡았다. 그때 일본은 예수회와 프란치스코수도회의 맹활약으로 기리시탄(가톨릭) 세력이 30만명까지 급증해 있었다. 이에야스의 에도(江戶) 막부는 기리시탄 세력을 탄압하며 쇄국에 돌입했다. 기리시탄 처형과 기리시탄을 중심으로 한 농민 반란(시마바라의 난·1637)이 이어졌다. 1637년 일본은 가톨릭 세력을 추방하고 완전히 나라 문을 잠갔다. 추방된 집단은 예수회와 프란치스코수도회, 그리고 이들을 앞세웠던 포르투갈과 스페인이었다. 개신교 국가 네덜란드는 예외였다. 네덜란드는 목적이 오로지 교역이었으니까.

거기에 미우라 안진(三浦按針)이 살다가 죽었다. 안진은 하타모토(旗本)다. 하타모토는 막부 쇼군을 알현할 수 있는 상급 무사다. 상급 무사 미우라 안진은, 영국인이다. 본명은 윌리엄 애덤스다.

영국인 사무라이, 미우라 안진

1602년 후발 주자 네덜란드는 시장 개척 자본을 위해 왕명으로 동인도회사를 설립했다. 세계 최초 주식회사다.

영국인 윌리엄 애덤스는 동인도회사 창설 초기 직원으로 대서양을 건너고 태평양을 건넜다. 런던 빈민가 라임하우스에서 성장한 서른다섯 먹은 사내는 네덜란드가 비밀리에 선단을 꾸린다는 소식에 무작정 지원했다. 1599년 출항한 선단 5척 가운데 두 척은 스페인 해적에게 나포됐고 한 척은 돌아갔다. 한 척은 태평양에서 침몰하고 애덤스가 탄 리프데호만 남았다. 1600년 4월 19일 탈탈 털린 리프테호가 표류 끝에 일본에 도착했다.

일본 나가사키현 히라도에 있는 영국인 윌리엄 애덤스의 무덤.
일본 나가사키현 히라도에 있는 영국인 윌리엄 애덤스의 무덤. 1600년 네덜란드 상선을 타고 일본에 표착한 애덤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미우라 안진(三浦按針)으로 이름을 바꾸고 상급 사무라이 신분과 토지와 돈을 받고 에도막부 외교 및 통상 고문으로 일하다 죽었다.
오사카에서 이에야스를 만난 애덤스는 가톨릭과 개신교의 차이, 지구를 도는 여러 항로와 선박에 대해 한밤중까지 얘기했다. 신부들은 네덜란드 배를 타고 온 이 이교도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애덤스는 투옥됐다. 두 번째 만남에서 이에야스는 영국과 전쟁과 평화와 모든 종류의 짐승과 천국에 대해 물었다. 그리고 애덤스는 석방됐다. 1603년 이에야스는 애덤스에게 유럽식 선박 건조를 명했다. 애덤스는 80t짜리 배를 건조한 데 이어 120t짜리도 건조해 성공리에 진수시켰다.

이에야스는 애덤스를 통상과 외교 고문으로 삼았다. 망설이는 애덤스에게 이에야스는 후지산이 보이는 저택과 농노 80~90명이 딸린 영지를 선물하고 하타모토 작위를 내렸다. 빈민가 출신 영국인은 이후 오래도록 귀국을 요청하지 않았다. 대신 미우라 안진이라는 이름으로 살다 죽었다. 미우라는 그가 살던 영지였고 안진은 '도선사'라는 뜻이다. 애덤스는 히라도(平戶島)에 묻혀 있다. 조선을 탈출한 하멜이 처음 상륙했던 그 섬이다.

쇄국, 그리고 데지마의 개항

나가사키 역사문화박물관
가톨릭 세력이 퇴조할 무렵 네덜란드와 영국 상선이 일본을 찾았다. 영국이 먼저, 네덜란드가 나중에 히라도에 상관 개설을 허가받고 교역을 시작했다. 미우라 안진을 통하면 이 개신교 국가들에 안 되는 일이 없었다. 일본 예법을 무시했던 영국은 상관장 콕스가 불화를 일으킨데다 인도시장에 집중하기 위해 1623년 상관을 폐쇄했다. 1637년 포르투갈 상인들이 추방됐다. 이들은 나가사키 상인들이 만든 인공섬 데지마(出島)에 상관을 운영하고 있었다. 4년 뒤 데지마는 네덜란드인이 차지했다. 길이는 180m에 폭은 60m 정도. 통역가와 창녀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일본인도 들락거릴 수 없었고, 그 어떤 네덜란드인도 나올 수 없었다. 오로지 교역만 허용되는 독신 네덜란드인의 감옥이었다. 그런데 이게 일본을 바꿀 줄은 아무도 몰랐다.


열린 지도자와 열린 학자

매년 기압계, 온도계, 비중계, 카메라, 환등기, 선글라스, 메가폰 등 여러 물건이 수입됐다. 매년 봄 에도에 네덜란드 상인이 오면 나가사키야(에도의 네덜란드 상인 구역)에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스기타 겐파쿠, '난학사시', 1815)

1716년 취임한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德川吉宗·재위 1716~1751)는 실용주의자였다. 그가 행한 교호개혁(享保改革)에는 토지 개발과 세금 정액제 그리고 서양 서적 금지령 완화가 포함돼 있다. 네덜란드어 번역 관청도 설립했다.(김성수, '해체신서와 일본의 서약의학 수용')

어느 날 요시무네에게 데지마 통역사가 상소를 했다. "말로만 통역을 하게 하니 오류가 많다. 문자를 배우게 해 달라." 그림이 많이 들어 있는 책을 보냈더니 요시무네가 매우 즐거워하며 말했다. "설명을 읽을 수 있다면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이다. 에도에서도 누군가 배운다면 좋을 것이다."(스기타 겐파쿠) 학자들은 해금된 네덜란드 책을 돌려가며 읽었다. 사람들은 그 학문을 난가쿠(蘭學)라 불렀다. 화란(네덜란드) 학문이라는 뜻이다. 에도는 학문의 자유 시대를 맞고 있었다.

'요 임금 창자나 폭군 걸의 창자나'

맨 먼저 자극받은 사람은 의사들이었다. 도무지 중국 전통 의서와 실제 몸이 서로 맞지 않는 것이다. 1754년 의사 야마와키 도요(山脇東洋)가 사형수를 대상으로 첫 해부를 했고 5년 뒤 첫 해부학 서적 '장지(藏志)'를 펴냈다. 1774년 또 다른 의사 스기타 겐파쿠와 그 동료들이 데지마 관리로부터 네덜란드 해부학서 '타펠 아나토미아(Ontleedkundige Tafelen, 1734)'를 번역해 '해체신서(解體新書)'를 출간했다. 야마와키 도요가 이리 말했다.

18세기 일본 의사들이 펴낸 서적들.
18세기 일본 의사들이 펴낸 서적들. 왼쪽부터 일본 최초 해부학 서적 '장지(藏志·1759)', 최초의 유럽 해부학 번역서 '해체신서(解體新書·1774)', 그리고 해체신서 번역 작업을 기록한 난학사시(蘭學事始·1811). 데지마를 통해 배운 신학문 '난가쿠(蘭學)'는 일본 사회를 혁명적으로 변화시켰다.
'이론은 뒤집힐 수 있지만 사물이 어찌 속이겠는가. 이론을 앞세우고 사실을 뒤에 넣으면 상지(上智)라도 실수가 없을 수 없다. 요 임금 내장도 내장이고 폭군 걸 내장도 내장이고 북쪽 남쪽 오랑캐 창자도 창자일 뿐이다(理或可顚倒 物焉可誣 先理後物 則上智 不能無失也 堯之臧亦然 桀之臧亦然 蠻貊亦然).' (야마와키 도요, '藏志', 1759) 이론은 뒤집힐 수 있되 사실(Fact)은 어찌할 수 없다! 이 명쾌한 답을 얻어내면서 일본 지성계는 코페르니쿠스적으로 돌변했다. 에도에만 600군데가 넘는 서점과 이동도서관을 통해 난가쿠 책들은 구름처럼 퍼져나갔다.(이종찬, '조선 실학 대 일본 난학') 오사카는 서적의 많음이 실로 천하 장관(大坂書籍之盛實爲天下壯觀)이었다.(신유한, '해유록', 1719)

개혁군주 정조와 지식의 독점

조선 22대 왕 정조(재위 1776∼1800)는 개혁 군주라 불렸다. 쇼군 요시무네보다 한 세대 뒤다. 정조가 청나라에서 '사고전서(四庫全書)'를 출판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고전서'는 역대 중국 왕조 서적을 종합한 백과사전이다. 1776년 북경 사신이 보니 출간이 미완성이라 사신들은 그 인덱스 격인 '고금도서집성' 5020권을 은화 2150냥을 주고 사왔다.(1777년 2월 24일 '정조실록') 정보는 낡았고, 유통도 되지 않았다.

'책을 사러 갔을 때 연경 서점 사람들이 비웃으며 "간행된 지 50년이 지났는데, 귀국은 문(文)을 숭상한다면서 이제야 사 가는지요? 일본은 나가사키에서 1부, 에도에서 2부 등 이미 3부를 구해 갔습니다"라 했다. 왕이 매우 보배롭게 애지중지하여 홍문관에 보관시키고 각신 이외 신하들과 서생(書生)들은 구경해본 자가 없었다.'(홍한주, '지수염필', 진재교, '국가권력과 지식, 정보' 재인용)

1791년 조선 또한 서학(西學, 기독교)이 문제가 되자 "홍문관에 소장돼 있는 서학 서적을 소각하자"는 상소가 올라왔다. 이에 왕은 "멀리 큰 거리에까지 내갈 것 없이 즉시 홍문관에서 태워버리라(卽令館中燒火)" 하였다.(1791년 11월 12일 '정조실록') 해부학 서적 '태서인신개설(泰西人身說槪)'도 분서(焚書)됐다.

2009년 3월 서울대의대에서 열린 한 심포지엄에서 1899년 일본 서양 의사가 1만5000명이 넘었다는 발표가 있었다. 1903년까지 대한제국 의학교 졸업생은 32명이었다. 원로교수들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김옥주, '에도 말 메이지 초 일본 서양의사의 형성에 대하여', 의사학 제20권 제2호, 2011)

데지마 전시관에는 유럽 지식을 빨아들여 일본인 손으로 만든 기계들이 전시돼 있다. 어디에서부터 무엇이 달랐는가. 왜 달랐는가. 〈⑨성리학과 난가쿠(蘭學)·下에서 계속〉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3/06/201903060002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