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소문 포럼] “나도 영어로 할걸 그랬나” [중앙일보]

2010.02.16 19:37 입력 / 2010.02.17 09:27 수정

홍콩에서 5년 가까이 특파원으로 있으면서 보고 느낀 게 적지 않다. 그중 독자들과 꼭 함께하고 싶은 게 있는데 바로 한국 공직자들의 국제 경쟁력에 관한 거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치며 한국의 공직사회가 많이 변했고 또 변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안다. ‘철밥통’ 운운하는 국민의 원성에 경쟁 시스템이 일부 도입된 것도 안다. 박봉에 노예처럼 일하는 실력 있는 공무원도 분명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공감한다. 아직은 이게 대세가 아니라는 걸.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으니 자치단체장 얘기부터 해야겠다. 한 번은 한국에서 잘나가는 도지사 한 분이 홍콩에 왔다. 홍콩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한 프로모션 행사를 주재하기 위해서였다. 행사장은 홍콩에서도 알아주는 5성 호텔 연회장이었다. 현장에 도착해 보니 도지사는 보이지 않고 홍콩 여행사 대표 등 200여 명이 이곳저곳에서 담소를 나누느라 바빴다. 도지사의 행방을 물었더니 VIP라 행사가 시작되기 직전 VIP 대기실에서 거동한다는 거였다. 귀를 의심했는데 정말 그랬다. 사회자가 행사 개막 임박을 알리자 이분은 당당하게 행사장으로 걸어 나왔다. 거의 국가 원수 수준의 위엄이 있었다. 가관이었다.

한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도지사 말씀 순서. 갑자기 젊은 여성 한 명이 그를 따라 단상에 올랐다. 하도 위엄이 있어 무슨 경호요원인 줄 알았는데 통역이었다. 도지사는 고개 팍 숙인 채 한국어 원고를 읽기 시작했고 문장마다 영어 통역이 이어지는데 서로 호흡을 안 맞췄는지 자꾸 엇박자가 났다. 좌석에선 ‘킥킥’ 소리도 들렸다. 다음은 홍콩 관광국에서 나온 관리의 환영사. 그는 원고도 없었다. 시종 참석자들과 눈을 맞추며 대화 나누듯 유창한 영어로 한국과 홍콩의 관광 협력 필요성을 설파하는데 명쾌하고 자연스러웠다.

두 사람을 비교하자는 것은 아니다. 영어로 공부했고 매일 외국인들 상대로 세일즈하는 홍콩 공무원과는 애초에 비교가 무리다. 다만 국제도시 홍콩에서 ‘관광상품’을 팔러 온 나리가 한국어로 상품을 팔려 한 ‘어리석음’, 그리고 자신이 객인지 주인인지도 모르고 폼 잡는 ‘몽매함’을 말하고자 함이다.

행사가 시종 영어로 진행되자 도지사가 머쓱해하며 한마디 했다. “나도 영어로 할걸 그랬나.” 도민들은 분명 몰랐을 거다. 자신들의 손으로 뽑은 도지사가 밖에 나가 관광객 유치하겠다며 세금 수천만원 펑펑 쓰면서 한국의 국격까지 깔아뭉개고 있는 줄. 올 6월 선거 때 유권자들 정신 안 차리면 이런 도지사 얼마든지 나온다.

중앙부처 엘리트 나리들은 어떨까. 별 차이 없다. 특파원 부임 후 얼마 안 돼 고관대작 한 분이 베이징을 거쳐 홍콩을 방문했다. 능력도 출중하고 청렴하다고 소문이 난 분이라 한마디 들을까 해서 조찬에 참석했다. 기자와의 대화 몇 토막이다.

“중국 방문 소감 한마디….”

“대단합디다. 글쎄 내가 여기(홍콩) 온다고 경호원까지 붙여주는 거야. 정말 대단해.”

“중국 공직자들 어때요.”

“조어대(중국정부 영빈관)에서 묵었는데 음식도 기가 막히고 참 공손합디다. 좀 지나니까 다꺼 다꺼(형님 형님) 하더라고.”

기자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아니 물을 필요가 없었다. 어떤 대접을 받았는진 몰라도 그는 조찬 내내 중국에 감탄했다. 그는 미인계가 아닌 의전계에 홀려도 단단히 홀려 있었다.

국제금융위기 이후 홍콩에선 크고 작은 한국 홍보활동(IR) 행사가 많았다. 그중 잊지 못할 경험 하나. 경제 관료 몇 분이 외국인들을 상대로 한국에 투자 좀 하라고 IR을 했다. 외국 투자자와 외신기자 등 30명 정도가 참석했다. 관료 한 분이 단상에 올라 “한국 경제 건실하다”고 설명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뭔가. 곧바로 시골 초등학교 교장선생님 ‘국민교육헌장’ 낭독 버전이다. 한번 영어 원고를 향해 내리깐 눈은 낭독이 끝나는 15분여 동안 단 한 번도 관객들을 향하지 않았다. 대인기피증 환자 같았다. 10분쯤 지나자 외신기자 두 명이 눈을 비비더니 나갔다. 낭독이 끝나고 질의응답 시간. 외국 기자가 한국 주식 공매도 비율에 대한 질문을 했다. 답변을 담당한 다른 관료가 갑자기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더니 앞자리에 앉은 홍콩 주재 한국 금융인 한 분에게 “공매도 관련 질문인 것 같은 데 통역 좀 부탁합니다” 한다. 지엄하신 나리가 창피당하게 생겼는데 무슨 수로 거부하나. 어찌어찌 답변을 해 위기는 넘겼다. 이후 질문은 없었다. IR은 그렇게 끝났다. 이쯤에서 뚜껑 안 열릴 한국인이 있을까. 그래서 사석에서 공직자들을 만나면 “국가 망신 좀 그만 시키라”고 여러 번 말했다. 그때마다 적지 않은 공직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도 홍콩이나 싱가포르처럼 봉급 많이 주면 잘할 수 있다.” 독자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세요?

최형규 내셔널 데스크·전 홍콩특파원 <SCRIPT type=text/javascript src="http://news.joins.com/_include/javascript/set_article_section_link.js"></SCRIP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