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샌델 저, 이창신 역, 『정의란 무엇인가』(김영사, 2010) 서평  

 

 

우리는 항상 문제를 안고 산다. 문제를 보는 눈도 여럿이다. 이념적 시각 따라 문제 해석에 차이를

보인다. 또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천착하기 보다 실증주의에 묻혀 본질보다는 표피에 익숙해

왔다. 이른바 수치화된 자료를 내 세워 설득하기를 다반사로 했다. 그런데 1960년에 한 케네디

후보와 2008년에 한 오바마 후보의 연설은 색달랐다. 이들의 공통점은 공동체의 도덕성에 호소한

것이다. 보통은 (1) 모두가 행복하면 된다는 공리주의(Utilitarianism)적 사고를 내세우거나, (2) 개인의

자유가 우선해야 한다는 자유의지주의(Libertarianism)인데,  반해 이들은  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를 내세워 미덕(virtue)의 중요함을 일깨웠기 때문이다. 정의를 이해하는 기준

으로 제시한 이들 세가지를 놓고 저서는 역사상 인물들, 이른바 아리스토텔레스, 벤탐,

, 칸트, 프리드만, 롤스, 노직 등의 견해를 빌려 현실 문제의 본질을 파고 든다. 이를 테면 인간

은 자신을 소유하는가, 아닌가 라는 칸트의 이성론적 사고를 대입해 장기 매매의 부당성을 파헤

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저자는 “개인의 성찰만으로 정의의 의미나 최선의 삶의 방식을 발견할 수 없다.(465)며 공동체의식을 중요성을 책 모두에서부터 강조한다. 도덕적 사고란 혼자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럿이 함께 노력해 얻는 것이라는 믿음이 강하다. 그러기 위해 동굴의 안팎을 오가며 원칙과 상황도 익혀야 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동굴 속에서는 벽에 비친 희미한 자신의 영상도 제대로 보지 못한다. 누구나 빠지는 도덕적 딜레마에 매년 1000명의 하버드 학생들이 매료될 만 했다.

 

 개인이나 정부는 복잡한 것은 피하고 편의를 쫓는 경향이 있다. 최소국가론도 그래서 설득력이 없지 않다. 자동차 안전 벨트나 자전거 헬멧을 써야 한다거나 심지어 매춘과 동성애 같은 것 조차 국가가 간섭하면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고까지 생각한다. 그러기에 대리모 출산이나 미국의 남북 전쟁 때처럼 징집 대신 사람을 고용해 대신 출정하게 하는 것이 자유로운 선택으로 서로가 행복할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까지 정당하다고 우긴다. 그러나 “자유시장에서 우리의 선택은 얼마나 자유로운가? 세상에는 시장에 존재하지 않는, 그리고 돈으로 살 수 없는 미덕과 고귀한 재화가”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한번쯤은 고민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저자의 입장은 공리주의를 거부하면서 사회계약에 기초한 정의를 강조한다. 중요한 것은 동기로 칸트의 입장을 대변한다. 도덕적 가치는 결과가 아니라 동기에 있고(157) 이것은 또 원칙의 문제이기도 하다. 세종시 원안과 수정안을 놓고 맞선 후 원칙론이 승리한 예가 상기된다. 한국 정치에서도 정의의 숨결이 거칠어졌으면 좋겠다. 원칙론은 공적 삶의 핵심적 사고 방식이라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양도할 수 없는 권리가 있다는 것에 찬성한다. 인간은 존중 받아야 할 존엄성을 지닌 이성적 존재로서 칸트를 옹호하는 이유는 그가 공리주의를 맹박하기 때문이다. 도덕이란 행복(원저에는 welfare) 극대화를 비롯한 어떤 목적과도 무관하고 도덕이란 인간 그 자체를 목적으로 여기고 존중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인간의 존엄성은 보편적 법칙을 따르는 능력에 달려 있고, 자율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자신을 존중하고,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자유행동이 도덕적 행동이고 이것이 곧 정언명령적 행동이라는 것이다. 흥미ㆍ바람ㆍ욕구ㆍ기호 같은 경험적 요소로 도덕이 좌우될 수 없다. 정의의 원칙도 마찬가지여서 공동체의 이익이나 욕구에 좌우될 수 없다. 최고의 도덕적 원칙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순수실천이성’을 연습하는 것이다.(150)

 

 정의에 관한 이야기로 말하면 저자는 존 롤스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롤스의 사회계약은 “원초적으로 평등한 위치에서 이루어지는 가언합의다.” 합의만으로는 의무가 생기지 않고 자율과 호혜가 따라야 한다고 믿는다(203). 저자는 타고난 우연과 사회적 우연을 대비시키며 “평등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능력위주 시장사회의 유일한 대안이라면 재능 있는 사람에게 불이익을 주어(납덩이 신발 신게 하는 것과 같은) 강제로 평등을 달성하는 일뿐이라고….”하여 롤스를 비판한다. 특목고에 불이익을 주려는 이 나라 교육정책가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대목이다. 한편 하버드 대학 입학을 놓고 노력이 혜택 받은 가정환경의 산물인지도 논의하고 있다.

 

결국은 누가 어떤 자격을 가졌는가와 같은 의문을 파헤칠 때 당면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처럼 영광과 포상이 따르는 사회적 텔로스(telos, 목적)를 이해하는 것이다. 기여금 입학제로 고민하는 대학의 경우에 대학의 텔로스 역시 학문의 우수성만 따지면 되는 것인지, 공적 이상까지 추구해야 하는 것인지 논의는 논의를 물고 한 없이 전개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는 정의의 목적은 “어느 목적에도 치우치지 않는 권리의 틀을 정하는 게 아니라 좋은 시민을 양성하고 좋은 자질을 배양하는 것”이다.(270). 좋은 삶을 사는 법을 터득해야 하고 폴리스에서 살며 함께 고민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옳고 그름, 선과 악, 공정과 부정을 고민할 때 능력은 개발되는 것이라고 믿는다.(275). 아리스토텔레스가 특히 폴리스에서의 연찬을 강조하는 이유는 도덕적 미덕이라는 것은 습관의 결과로 생기고 예술처럼 연습해 행동으로 터득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정의는 적합성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인가? 분배의 문제인가? 가치 측정의 문제인가? 골프 선수 중 장애자가 주장하는 대로 골프 카트를 타고 경기를 하게 한다면 이것이 공정성에 어긋나는 것일까? 그러나 골프라는 운동의 본질이 치는 것이지 걷는 게 아니라고 한다면 비록 카트를 타고 경기를 한 들 규칙을 위반하는 것일까? “정의와 권리에 관한 논쟁은 사회제도나 조직의 목적, 그것이 나누어 주는 재화, 그리고 영광과 포상을 안겨주는 미덕에 관한 논쟁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법을 만들 때 이런 문제에 중립을 지키려고 노력하지만, 좋은 삶의 본질을 논하지 않고서는 공정성을 말하기가 불가능해 보인다.(289). 정의에 관한 논쟁은 어쩔 수 없이 본질적인 도덕의 문제로 이어진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을 칸트와 롤스가 거부하는 이유는 그가 자유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정의와 공동선은 어떤 관계인가? “구제금융이나 상이군인 훈장, 대리 출산이나 동성혼, 소수집단우대정책이나 군 복무, 최고경영자의 임금이나 골프 카트 이용권을 두고 어떤 논란을 벌리든, 정의는 영관과 미덕, 자부심과 인정에 관한 대립하는 여러 개념과 밀접히 연관된다. 정의는 올바른 분배만의 문제는 아니다. 올바른 가치 측정의 문제라는 것이다.(339)

 

정의와 권리를 계산 문제로 전락시킬 수는 없는 일이다. 또한 인간 행위의 가치를 하나의 도량형으로 환산해 획일화 하며 질적 가치를 무시할 수는 없다. “정의로운 사회는 단순히 공리를 극대화하거나 선택의 자유를 확보하는 것만으로는 만들 수 없다. 좋은 삶의 의미를 함께 고민하고, 으레 생기게 마련인 이견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문화를 가꾸어야 한다.”는 것이 샌델의 확고한 정의관이다. “물질적 빈곤을 없애려고 아무리 노력한 들 더 어려운 일이 따로 있습니다. 우리 모두를 괴롭히는 (……….) 만족의 결핍에 맞서는 일입니다.” 케네디의 이 말이 정치는 도덕적이고 영적인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메시지로 대신할 수 있다. 케네디처럼 오바마도 추구한 공동선의 정치는 (1) 시민의 미덕부터 키우고(당신은 미국에 투자하고 미국은 당신에 투자하고….., (2) 사회적 행위(대리모 출산, 장기 매매 등)를 시장에 맡겨 그 행위를 규정하는 규범이 타락하게 해서는 안 되고, (3) 재분배로 불평등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다지만 빈부격차가 지나치면 민주시민에게 요구되는 연대의식이 약화되어 이를 방지해야 한다. ‘공동의 장’이 사라지면 부자 따로, 가난한 이 따로 되어 공동시민의식은 찾을 길이 없어질 지도 모른다. 시장에 매료된 보수주의자와 재분배에 주목하는 자유주의자들이 이런 손실을 간과하기 십상이라는 것이 저자의 신념이다. 그래서 공공기관과 공공서비스의 질을 높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도덕적 이견에 좀더 적극적으로 가담해 상호 존중하는 태도를 고양하고 서로 증오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일단 학습해 보자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정의의 문제를 여러 이론과 견해, 그리고 실제 문제를 놓고 파헤친 샌델의 업적은 두고두고 회자될 법 하다. 다만 그의 공동체주의에 문제가 없지 않다는 점은 지적해야 마땅하다. , 그는 찰스 테일러 Charles Taylor나 마이클 월저 Michael Walzer 같은 공동체주의자인 것은 분명하지만 공동체가 선을 가리는 최종 중개자인 것에 선뜩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설득시키냐의 문제가 남는다. 이런 이른바 문화 상대주의는 인권의 보편성에 관한 헌신과 양립하기 어려운 문제를 야기한다. 그래서 다음의 과제는 에지오니 Amitai Etzioni의 지적대로 싱가폴 같은 동아시아의 완벽한 공동체주의와 호응적 또는 네오 공동체주의와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는 입장을 전개하는 일이다. 결국은 우리 공동체의 특수 가치와 보편적 인권에 대한 공여 간의 문제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이냐의 문제이다. 공리주의의 환상에 빠져있는 경제학도를 비롯해서 공공부분의 고위 정책관료들이 높은 수준의 커뮤니티를 구축하고 대국민 서비스의 질을 높이기 위해 이 책 보기는 필수 중의 필수다(본문원고분량, 4.644)(평자, 김광웅,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좋은 책 선정위원회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