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官피아 자리에 政피아] [上] 결재 도장 찍는 곳 몰라 헤매는 監事(감사)… 일은 않고 '여의도'만 바라봐

  • 박유연 기자
  • 박승혁 기자

  • 윤주헌 기자
  • 입력 : 2015.01.31 03:03

    [정치권 출신 낙하산 백태]

    줄대기 더 심해지고 - 연줄따라 인사 청탁 난무… 정치 할 욕심에 勢 다지기도
    업무 전문성은 바닥 - 기본적인 용어도 파악 못해 결재 받는데 몇시간씩 걸려
    정치권 예속도 심화 - 감독당국 찾아가기보다 정치권 통해 문제 해결해

    A기관의 B부장은 작년 6월 부임한 C감사에게 결재를 받으러 갔다가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감사가 서류 어느 곳에 도장을 찍어야 할지조차 몰라 한참을 헤맸기 때문이다. 얼마 전엔 다른 보고를 하러 들어갔다가 해당 감사가 규정집의 8페이지에 있는 내용을 찾지 못해 500페이지가 넘는 규정집을 모두 넘겨 보는 장면도 목격했다. B부장은 "도대체 뭘 하는 사람인지 모르겠다"며 "내용을 전혀 모르니 우리가 시키는 대로 하는데, 저런 사람이 어떻게 내부 감시와 경영진 견제를 하겠다는 건지 도통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C감사는 대선 캠프에 몸담았던 이른바 '정피아(정치권+마피아의 합성어)' 출신이다.

    관피아를 막으니 그 빈자리를 정피아가 채우고 있다. 사진은 작년 11월 기업은행노조가 이수룡 감사의 첫 출근을 저지하는 모습이다. 노조는 당시 “신임 감사가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 캠프에서 일한 전형적인 정피아”라고 주장했다.
    관피아를 막으니 그 빈자리를 정피아가 채우고 있다. 사진은 작년 11월 기업은행노조가 이수룡 감사의 첫 출근을 저지하는 모습이다. 노조는 당시 “신임 감사가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 캠프에서 일한 전형적인 정피아”라고 주장했다. /기업은행 노조 제공
    D금융사의 직원들은 역시 정피아 출신인 E감사 얼굴 보기가 어렵다. 회사보다는 여의도 국회에 가 있는 시간이 더 많기 때문이다. D금융사의 한 직원은 "감사가 하는 일이란 게 법인카드를 갖고 나가 과거 같이 정치했던 사람들에게 밥 사고 술 사는 것밖에 없다"며 "관피아가 후배 공무원들에게 밥을 살 때는 정부와 관계가 좋아지는 이점이라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냥 없는 사람인 셈친다"고 했다.

    박근혜 정부는 공공, 금융, 노동, 교육 등 4개 분야를 '4대 개혁'의 대상으로 꼽고 대대적인 개혁 의지를 천명했다. 그런데 해당 분야의 인사를 전문성 없는 정피아가 장악하면서, 개혁과는 정반대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현장에서 말하는 정피아의 문제점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청탁 인사·민원 기승

    지난해 민간에서 영입된 F공공기관의 기관장은 취임 직후 "줄대기 인사는 더 이상 없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이 기관에선 여전히 줄대기 인사가 극성이다. 저마다 배경이 다른 정피아 출신 비상임이사(사외이사)들이 개인적인 부탁을 받고 청탁 인사를 넣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기관의 인사 담당 직원은 "힘센 비상임이사들의 부탁을 거절하기 어렵다"며 "그들 스스로 연줄을 타고 내려온 사람들이라 보내준 사람들의 부탁을 거절하기 어렵고 결국 줄대기 인사 관행엔 바뀐 게 없다"고 토로했다.

    작년 4월 이후 공공 기관과 금융 회사에 진출한 정피아의 보직 그래프
    본지가 302개 공공기관, 118개 금융회사 등 총 420개 기관 소속 기관장·감사·임원·사외이사·비상임이사의 작년 4월 16일 이후 교체 현황을 전수조사한 바에 따르면 교체 인원 980명 가운데 116명이 정피아였다. 이들을 출신 배경별로 분류하면 정치인(의원·보좌관) 출신 50명, 청와대 및 부속기구 직원 13명, 여당 당직자 13명, 대선캠프·인수위원회 출신 12명 등이다.

    이들은 스스로가 각자 정치적 배경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청탁 인사를 거절하기 어렵다. 오히려 이를 지렛대 삼아 추후를 도모하는 경우도 있다. 한 공공기관 인사 담당자는 "정피아들은 스스로 언제든 자신이 다시 정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계속 세를 다지려고 한다"며 "그래서 청탁 인사가 가장 심한 사람들이 정피아"라고 했다.

    작년 4월 이후 기관장, 감사로 임명된 정피아 명단 표
    전문성 부족

    G금융회사의 감사는 취임한 지 넉 달이 지났지만 아직 금융 용어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보고가 올라오면 설렁설렁 넘어가기 일쑤이고, 자세하게 살펴보지 않아서 "이 부분은 반드시 결재가 필요하다"는 직원들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결재하곤 한다. 직원들이 가장 곤란해할 때가 가끔 특정 보고 건에 관심을 가질 때이다. 용어를 하나하나 설명해줘야 해서 결재를 받기까지 몇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이 회사 직원은 "가끔 내가 금융 교육 강사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며 "관피아가 100배 낫다"고 했다.

    공공기관과 금융회사 임원의 임기는 보통 3년이다. 하지만 관련 분야 재직 경험이 없는 정피아들은 업무 파악에만 6개월~1년의 시간이 걸린다. 아예 업무를 안 배우려는 경우도 많다. 정피아 출신의 한 인사는 작년 5월 부임한 후에 지금껏 경영전략 회의나 임원 모임에 한 번도 나간 적이 없고, 모두 소속 직원을 대리 참석시켰다. 그러면서 일상 업무는 무조건 '규정대로'만 요구해서 업무 효율성이 극히 떨어진다.

    정치권 예속 심화

    기획재정부·금융위원회 등 경제 부처들은 요즘 들어 정치권 전화를 받는 일이 부쩍 늘었다. 공공기관과 금융회사에 대한 평가나 검사를 할 때 정치권으로부터 잘 봐달라는 부탁을 받는 것이다. 보통의 감사나 사외이사들은 회사에 현안이 생기면 감독 당국을 찾아가 설명을 하고 이해를 구한다. 하지만 정피아들은 과거 몸담았던 정치권을 찾아간다. 그러면 정치권이 당국에 연락을 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식이다. 그러면서 공공기관과 금융회사들의 정치권에 대한 예속이 더욱 심해졌다. 한 금융회사 직원은 "예전에는 관 눈치만 보면 됐는데 이제 정치권 눈치도 봐야 한다"며 "갈수록 일하기 어려워진다"고 하소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