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희영 칼럼] '회장 公募'라는 사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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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06.11 22:59

송희영 논설주간

CEO 공모는 미리 낙점하곤 들러리 후보들을 세우는 사기성 가장행렬이다
뒤늦게 속은 줄 알고 反정권 된 이 적지 않다

두 달 전 신용카드 업계가 좋은 구경거리를 선물했다. 카드회사 경영인 출신을 협회장(여신금융협회)에 뽑으려던 중 느닷없이 경제관료 출신이 공모 후보에 끼어들었다.

동업자끼리 웃으며 박수로 끝날 듯하던 것이 1차투표-결선투표로 이어지며 날카롭게 대립했고, 뻔한 결과로 관료 출신이 내려왔다. 어디서 그를 보냈는지, 누가 팔을 비틀었는지 업계에서는 다 안다.

협회장, 공기업 사장, 국책 연구원 원장, 금융회사 회장 등 공개모집(公募)이라는 영입인사치고 자격이 탱탱한 인물끼리 벌이는 진짜 경쟁은 거의 없다. 들여다보면 낙점 후 'CEO 공모' 절차를 밟는 위선이 판친다. 어쩌다 진검승부로 흥행몰이하는 듯 보이는 공모도 가짜 쇼였음이 나중에 드러나곤 한다. 지금 진행되는 KB금융지주 회장 공모도 '다 아는 결과를 놓고 웬 소동이냐'고 야단이다.

민간 기업 출신 어느 공기업 사장은 솔직했다. "어느 날 고위 인사가 공기업에 생각 없느냐고 묻더군요. 갈피를 못 잡고 망설일 때 헤드헌팅 회사에서 다그치는 전화가 왔어요. 서류를 준비해달라고." 이미 내정됐으니 서류를 꼭 내라는 전갈까지 붙어왔다. 헤드헌팅 회사를 통해 영입하는 모양새만 갖추었다는 얘기다.

그러고도 공모 때면 후보 추천위원회를 만들고 수십명의 기다란 리스트를 작성해 다시 복수 후보로 압축하는 척하며 먼 길을 돌아간다. '윗분의 의중'대로 낙점하면서도 공모극에는 모략, 야합, 그리고 언론플레이까지 가미되곤 한다. 끝나면 '어렵게 인재를 모셨다'고 거짓 포장하거나 '투표로 공정하게 끝냈다'고 시치미 뗀다.

공기업 사장, 연구원장 공모 때는 정부 쪽에서 아예 후보 추천위원회부터 입맛에 맞는 인물로 장악해버린다. 후보 자격 심사 위원회 좌석에 공무원이 반절을 차지하기도 한다.

어쩌다 돌출 후보가 추천되는 사고가 발생하면 없던 일로 뭉개버린다. 코트라 사장 공모 때는 추천 후보 전원을 퇴짜놓았고, 다 결판났던 수협 은행장은 농림부가 총출동해 강제로 뒤집었다.

낙점 인물에게 버거운 상대가 경합을 벌일라 치면 투표 방법, 채점 방식을 바꿔 경쟁자를 차버린다. 어느 과학 관련 국책연구원 원장 선정 때도 유력 인사를 떨어뜨리려고 후보 추천위원회 투표 방식을 돌연 바꿔 말이 많았다.

외국인 주주가 더 많은 KT, 포스코 같은 순수 민간 기업과 민간단체 경영진 인사에도 보이지 않는 손의 파워는 막강하다. 어느 금융회사는 사외이사 7명 명단까지 전화로 일방 통보받았다. 이 회사에 정부 지분은 단 한 주(株)도 없다.

이런 음모와 공작의 총본산이 어디고, 또 누가 핵심인물인지 한 자리 노리는 후보라면 100% 잘 안다. 청와대와 감독기관은 '거른다'는 명분 아래 출신 검증, 재산 검증, 평판 검증, 사생활 검증을 해가며 '법(法) 밖의 권력'을 휘두른다. 깜깜한 밀실에 자기들끼리 모여 미운 놈 걸러내고 내 사람 올리는 과정이 바로 청와대 인물 검증이다.

어느 정권인들 이런 권력을 휘두르지 않은 적은 없지만, 공기업 경영진 공모 과정을 청와대가 총괄하는 체제는 노무현정권이 만들었다. 인재를 공모하겠다는 법을 만들어 놓고서 뒤에서 입맛에 맞는 인물에게 한 자리씩 돌리며 단맛을 즐겼다.

이 정권에서 달라진 건 찾을 수 없다. 오히려 눈치 없이 공모 경쟁에 나서면 검찰·금융감독원을 동원해 '신분조회'를 더 깐깐하게 해대는 통에 지레 포기해버리는 사람이 늘었다. 트릿한 인물이 뜨면 자진 사퇴라는 이름으로 해고 통보를 해버린다는 소문이 쫙 퍼졌다.

낙하산인사 중 괜찮은 인물을 골랐다고 할 수 있는 '미담'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영인 공모에는 라스베이거스의 마술보다 더 짜릿한 눈속임과 술수가 작동한다. 한쪽이 자발적인 탄성과 박수를 받는 반면 다른 쪽은 야유와 손가락질을 받는 점이 다르기는 하지만.

CEO 공모는 청와대 윗분 낙점 인사를 허울좋게 포장하는 사기(詐欺)성 가장행렬이다. 들러리 후보까지 세워가며 정지작업하느라 허비하는 에너지를 지켜보기가 고통스럽다. 눈치 없이 응모했다가 속았음을 알고서 반(反)정권으로 돌아서는 숫자도 적지 않다. '능력 없는 멍청이보다 더 멍청한 X은 줄 없는 멍청이"라는 불평의 확성기 음량은 좀체 가라앉지 않는다.

이럴 바에야 대통령·장관이 한 명을 딱 찍는 편이 투명하고 솔직하다. 그래야 잘 골랐다는 칭찬을 듣거나 잘못 고른 책임을 질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