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세상은 왜 다를까?

 

 

 

 

지난 달 대전에 있는 카이스트KAIST의 한 부서가 주관하는 모임에 간 적이 있다. 학교를 지나 계룡산 쪽으로 한 참 간 곳에 벽이 모두 소금벽돌로 둘러싸인 빛소금집에서 몇 시간 세미나를 하며 토론한 주제가 창의와 융합이었다. 교육학, 경영학, 건축학 등 전공이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 앉아 각 분야의 견해를 들으니까 그 자체 융합이 되기도 하고 다른 아이디어를 얻으니 창조적 상상을 할 수 있어 좋았다. 정확히 말하면 융합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교류하는 가운데 아, 저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구나 하며 생각이 자극되고 느끼게 되었다. 사람이 모여 좋은 것이 서로가 같은 생각이나 다른 생각을 확인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열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평생 한 공부를 말하려면 좀 어중간하다. 왜냐하면 학사는 법학을, 석사는 행정학을, 그리고 박사는 정치학을 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가르친 것으로 말하면 행정학과 정치학 쪽이고 법은 잊은 지 오래지만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가치 중에는 정의, 질서, 신뢰 등이 단연 앞선다. 대학 민법 시간에 신의성실의 원칙이나 약속은 이행되어야 한다같은 라틴어의 법문이 평생 머리 속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말하자면 사람들이 모여 함께 일하는 조직이라는 곳에서 어떻게 해야 공존하고 공생할 수 있는지를 공부하고 가르친 셈이다. 그러기 위해 사람에 관한 공부를 했어야 했고 이들이 모인 집합체에 관한 것도 들여다 보아야 했다.

 

<융합의 길을 모색하며>

 

3년 전 학교에서 정년퇴임을 한 후 몰두한 공부 중의 하나가 융합에 관한 것이었다. 미래학문은 융합과학이 주종을 이루고 대학도 학제가 그렇게 재편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편 것이 이제 조금씩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세종시도 융합연구를 하는 요람을 만들겠다고 하는 계획을 보면 정부도 융합에 관한 인식의 눈을 뜬 모양이다. 3년 전 울산과학대학 설립 즈음해서 교육부 대학정책과장에게 새로 만드는 대학은 융합학제로 만드는 게 어떻겠느냐고 했더니 아무 반응이 없었던 것이 아직도 아쉽다. 기존 대학을 융합체제로 바꾸는 것 하고 새로 창립하는 대학을 그렇게 만들 수 있는 것 하고는 가능성에서 매우 큰 차이가 난다. 중앙대학 같은 사립학교는 재편이 가능한데 그만 유감스럽게도 융합적 재편이 아닌 듯 하다.

 

내가 융합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계기이자 근거 같은 것을 좀 말해야 이 글을 읽는 이들이 조금 더 이해를 할 수 있을 성 싶다. , 행정, 정치 등에 관한 공부를 하다 보니까 사람이 모이는 사회에 관한 것을 알아야 하고 개인의 심리나 이들이 모인 집단성에 관해서도 알아야 하고 법과 제도와 정책을 만드는 의도도 알아야 하고 그 효과는 어떤 것인지도 알아야 했다. 학문이 한 분야에 묶여서 되는 것이 아니라 범학문적 인식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이 사회과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기본 태도이다. 그러나 뒤에 이야기 하겠지만 그런 인식이 있으면서도 자신의 집에 담을 쌓기를 예사로 하는 것이 좀처럼 바뀌지 않는 학문세계의 실상이다.

 

그것을 좀 타파하고 싶어 1960년대 유학할 때 공부에 시달리면서도 토요일에는 단산학회檀山 學會라는 단체를 만들어 여러 분야의 학도들이 자신이 하고 있는 연구를 발표하고 토론했다. 옥수수 열매의 길이를 조정하면 낱 알맹이가 어떻게 된다는 등, 연극은 청중과 어떻게 호흡을 맞추어야 한다는 등, 그림을 보고 느낌을 말하여 심리상태를 측정하는 실험 등등 각 학문분야의 수 없는 연구를 접할 기회가 있었다. 물론 수박 겉 핥기 식이었지만 말이다. 그런 연찬이 1980년대 말 서울대학교에서 사회연구실천모임으로 이어지고 2006미래대학 콜로키엄으로 지속되면서 인문 사회 예술 과학 등 여러 분야를 접할 수 있었던 것이 오늘의 융합논의를 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조금이라도 이해의 깊이를 더 할 수 있었던 것이 내가 평생 사회과학방법론을 가르쳤고 이를 위해 과학사와 과학철학을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대학원 때 화이트 헤드, 버틀런드 러셀, 칼 포퍼, 어네스트 네이글, 리차드 러드너, 토마스 쿤 등의 저서를 읽게 된 것이 행운이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한 참 뒤 1990년대에 마커렛 위틀리나 또 그 뒤 2000년 대 초에 앤드류 애벗의 저서 등에서 반과학적 인식-정확히 말하면 신과학 또는 대체과학? 아니면 메타과학-에 관한 생각을 더듬을 수 있었던 것 또한 행운이었다. 엊그저께도 캔더스 퍼트의 감정의 분자를 읽으며 노에틱 사이언스Noetic Scienc가 댄 브라운의 『로스트 심벌』에만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워싱턴 DC에 있는 실제 연구소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과학, 믿음, 신비 등에 관한 이야기를 뒤에 하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암튼 과학주의든 신과학주의든 과학에 관한 것은 깊이는 모르나 흐름은 알고 이공계 연구자들과 좀은 어울릴 수 있었던 것이 내 생각의 지평을 넓히는 계기는 된 듯 싶다. 융합이란 학문의 경계를 넘어 교류하고 합칠 수 있으면 합하는 것인데 과학, 인문, 종교, 미학, 예술 등등 여러 분야의 연찬이 그래도 내 마음과 눈에 들어 온 것이 다행일 듯 하다.  

 

<그런데 생각들은 다 달라>

 

그런데 여기서 말하려는 것이 내가 융합을 할 수 있는 능력과 여건이 내 안에 조성되어 있다고 강변하려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내 분야에서도 그렇지만 내 밖의 분야 역시 알면 알수록 책에서 말하는 내용과 실제가 동떨어져 있다는 사실에 당혹하기 때문에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물론 개념의 세계와 실제의 세계는 아이소몰피즘isomorphism이라는 이름 때문이 아니더라도 같지 않을 수는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주제를 한정해 패러다임의 변화에 관한 인식과 실천이 아직도 천양지차라는 사실을 책에서나 실세상에서 접할 때마다 난 그만 절망하고 만다.

 

프랙탈 이론 등으로 리더십을 설명하는 마가렛 위틀리의 리더십과 신과학을 읽은 지가 15년이 넘었고 루트번스타인의 생각의 도구』도 읽은 지도 꽤 오래되었는데 아직도 사람들은 서로 창의와 융합에 관한 생각들을 정리하고 있지 못할 뿐 더러 실천과는 더욱 거리가 멀다. 정부가 세종시를 어찌 하겠다고 발표하려는 내용 역시 새 세기의 새로운 과학 흐름과 너무 거리가 먼 듯 하다.

 

창의의 경우 지금까지 여러 학문 분야에서 논의한 이야기야 한도 끝도 없다. 융합인 들 다르겠는가? 수 많은 전문가들이 어떻게 하면 좀 색다르고 더 나은 아이디어를 낼 수 없을 까 궁리해왔다. 한 학문분야만이 아니라 옆 동네에서 하는 것을 조금이라도 더 알면 얽히고 설킨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가 풀릴 듯 한데 그게 되지 않고 한 우물만 팠다. 자기 집중이 나쁠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일까?

 

<새로운 생각과 실천할 때>

 

수 많은 이론理論과 이론異論들을 여기서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내가 포교하고 다니는 패러다임의 변화에 관한 것만 말하고 글을 맺을까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이제 세상이 바꾸어 편해진 것을 겉으로만 상찬할 일이 아니라 원리가 변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으면 한다는 것이다.

 

21세기 양자 패러다임quantum paradigm 시대에 인간을 조직에만 묶을 수 없는 데도 정부가 발표하고 있는 내용을 보면 하나도 바뀐 것이 없다. 말로는 아날로그 시대를 넘어 디지털로, web 3.0, 신인류의 등장 등이라고 하면서도(실은 정부는 이런 용어도 쓸 줄 모른다) 생각과 표현은 아직도 20세기 이전이다. 도시를 꾸미려면 기반시설이며 기능적 분담을 왜 하지 말아야 하겠는가? 그러나 그 기본 출발은 장소가 고정되어 있는 것 space of place것이 아니라 흐름의 공간 space of flow 이라는 인식이 토대가 되어야 하는데 이제껏 유비쿼터스란 말만 할 줄 알지 그 깊이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중이온 가속기가 얼마나 좋은 융합의 구심점인가? 그런데도 이 의미를 해석할 줄 모르고 관리들이 만든 지도 놓고 기업 와라, 대학 와라 하고 있다.

 

이제 도시고 대학이고 기업이고 새로 꾸민다면 지구도 지구지만 우주적 시각에서 생명공학적 시각에서 신인류의 시각에서 집합론적 역사의 기억 속에서 아이디로! 꾸밈으로!’, ‘몸맘으로 함께!’, 생각만이 절대로 아니라 느낌과 감정으로 조감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면 제발 나서지 말았으면 좋겠다. 지금까지 몸도 잘 모르면서(인체의 본질을 Chemicophysiology라고만 생각했었으니까) 마음은 합리적이라고 착각하며 이론을 편 이들이 무수히 많았다. 인간이란 편견 덩어리고 대충 넘기려고 하는 속성(휴리스틱하고 프로스펙트한)이 많은데 이를 억지로 누르고 많은 경제학도들이 틀린 주장을 폈다. 물론 잘 안 되니까 막스 웨버처럼 역으로 억지를 쓴 것이지만. 정부만이 아니라 무슨 재단, 무슨 언론사 등등 한국의 내일을 걱정하고 계획을 세우는 사람들이 고작 내 놓는 안은 그래서 너무나 반미래지향적이라는 사실을 얼마나 파악하고들 있을까?

 

우리는 항상 책을 접하고 산다. 전공 공부를 할 때는 물론이고 일상 생활에 도움이 되는 상식적인 것도 책에 의존하게 된다. 평생 책을 읽고 사는 것이 생활화된 세상에서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숙제 중 하나가 왜 책이 말하고 있는 것과 세상은 일치하지 않느냐이다. 생각이 잘 정리된 책에서 말하고 있는 것을 전혀 따르지 않는 다는 것이 아니라 따르곤 있는데 한 쪽 주장에만 몰두하지 다른 쪽 생각은 아예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생각이 고정되어 있어서 그럴 것이다. 책에는 매우 풍부한 자원이 있다. 지구 안팎의 물리적 자원만 찾아 떠다니지 말고 책 안에 있는 무형의 무한 자원을 내 것으로 만들어 조금만 서로 도와 마음과 감정e*motion을 열고 아이디어를 채택하면 세상은 크게 달라질 것이다. 달라지지 않더라도 책에서 말하는 세상과 실제 세상의 간극을 한 참은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본문원고분량:  4,795)(글쓴이:  김광웅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행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