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적 설명과 이미지 사이

이은희 과학칼럼니스트 | 제138호 | 20091031 입력
건강하고 행복한 삶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과 반비례해 먹을거리에 대한 안전성이 의심되는 일이 자주 벌어지면서 ‘안전한 먹을거리’ 확보가 중요한 이슈가 되고 있다. 백화점이나 대형 마트에는 유기농 코너가 따로 만들어진 지 오래되었으며, ‘유기농 재료, 무색소, 화학물질 무첨가’라는 3대 구호를 자랑스럽게 내걸고 사람들을 유혹한다. 우연히 아파트 단지에서 ‘안전한 먹을거리 마련을 위한 조합’ 모임이 있다고 해서 참석 권유를 받았다. 마침 그날은 한 조합원이 ‘우유의 진실’에 대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날이었다.

‘우유의 진실’이란 우리가 즐겨 먹는 가공유에 대한 것으로 딸기맛 우유를 만드는 방법을 통해 ‘가공유가 왜 나쁜지에 대한 과학적 설명’을 제공한다는 일종의 교육 프로그램이었다. 딸기가 없어도 딸기우유는 만들어진다. 흰 우유에 딸기의 향을 갖는 향료와 분홍색을 만드는 색소, 그리고 달콤한 맛을 내는 당분을 적절히 첨가하면 시중에서 판매하는 것과 비슷한 딸기우유가 되는 것이다. 설명자는 이를 만들어 보여주며 우리가 가공유를 먹지 말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분명 이런 식으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음식들이 시중에 유통되는 것에 대해서는 불쾌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이날 ‘우유의 진실’을 설명하는 방식 역시 수긍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었다.

설명자는 가공유가 나쁜 이유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합성착향료와 인공색소는 모두 ‘석유’를 근간으로 하기 때문에 신체에 ‘독’으로 작용한다는 방식을 택했다. 석유는 먹지 못하는 것이니 석유에서 만들어낸 모든 물질이 몸에 해로울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어떤 물질을 먹을 수 없다고 해서, 이를 구성하는 모든 부분이 해롭다는 것은 생각해 봐야 할 문제다. 복어를 그냥 먹으면 죽는다. 하지만 피와 내장을 분리해낸 복어살은 ‘죽음과 바꾸어도 아깝지 않은 맛’이라고 극찬을 받는 식재료다. 또한 내가 먹을 수 없다고 해서 남들도 먹을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사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들이 석유에서 유래됐다는 것이 아니라 그 물질이 인체에 들어왔을 때 어떤 과정을 통해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것이어야 했지만, 정작 이에 대한 설명은 전혀 제공되지 않았다.

색소에 대한 설명도 마찬가지였다. 화학적으로 합성된 식용색소들이 발암물질로 작용한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합성색소의 안전성은 문제가 되고 있다. 이로 인해 천연색소가 인공색소에 비해 선호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코치닐과 치자에까지 연결되었다. 설명자는 이들이 분명 천연재료이기는 하나 먹는 것에 쓰이는 색소가 아니라, 천을 물들이기 위해 사용하는 색소이므로 이들 역시 ‘독’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코치닐은 식용색소로 쓴 역사가 오래되었으며, 치자 열매는 약재로 이용되는 물질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이야기가 이쯤 진행되니 아예 모든 색소가 든 물질은 몸에 해롭다는 논리로 진행되려나 했다. 그러나 이야기는 백년초가루나 당근즙, 쑥물 등 천연색소로 만들어진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방향으로 이어졌다. 천연색소라면 유독 코치닐과 치자만을 제외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 여기서도 코치닐과 치자가 어떤 방식으로 몸에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설명은 쏙 빠져 있었다. 과학적 진실이라더니 정작 ‘과학적’ 설명은 없고 ‘이미지’를 통해서 사람들의 혐오감을 일으키고 있었다.

현대는 과학의 시대라는 인식이 널리 퍼지면서 사람들은 소위 ‘과학적 설명’이라는 것에 쉽게 현혹된다. 그러나 이 과학적 설명이 종종 심각한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은 쉽게 눈치 채지 못한다. 과학적 설명이란 원인과 결과를 잇는 합리적 설명을 제공하는 것이지, ‘과학에서 사용하는 언어를 이용한 그럴듯한 설명’을 뜻하는 말은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