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대통령이 된다는 것

  • 오태진 수석논설위원
  • 입력 : 2012.12.20 00:24

    미국 미주리주 소도시 인디펜던스엔 독특한 표지판들이 서 있다. 중절모 쓰고 지팡이 짚은 노신사가 걷는 모습을 아무 설명 없이 실루엣으로 새겨놓았다. 표지판은 1953년 대통령에서 물러난 해리 트루먼이 고향에 돌아와 날마다 산책하던 길을 가리킨다. 그는 육군연금 111달러를 받으며 '트루먼의 오두막집'에서 20년 여생을 보냈다. 테라스에 앉아 옛 친구들과 체스를 뒀고 트루먼 기념 도서관에서 사서(司書) 일을 거들었다. 그는 퇴임 후 새롭게 평가와 존경을 받았다.

    ▶린든 존슨은 집권 말기 수렁 같은 베트남전에 넌더리를 낸 국민에게 외면당했다. 그는 1968년 재선에 나서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고향 텍사스 목장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좌절과 회한을 삭이지 못한 채 먹고 마시다 심장병을 키웠다. 72년 말 마지막 연설에선 "6년이나 나라를 다스리고도 그 정도밖에 이루지 못한 것이 부끄럽다"고 했다. 그는 한 달 뒤 집 마루에서 혼자 심장마비로 쓰러져 떠났다.

    ▶"새벽 3시 40분 침실로 돌아와 몸을 눕힌다. 5시 자명종이 울리기까지 내 늙은 어깨는 잔뜩 긴장하고 마음은 천리 밖을 헤맨다.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다. 다른 대통령들은 어떻게 견뎠을까." 걸프전을 치르던 '아버지 부시' 얘기다. 19세기 영미전쟁 영웅 앤드루 잭슨은 숭배에 가까운 인기를 누렸다. 그런 잭슨도 훗날 "솔직히 말해 내 대통령 시절은 고급 노예 생활이었다"고 했다. 윌리엄 태프트는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곳이 백악관"이라고 했다.

    ▶임기 한 해 남긴 김영삼 대통령이 청와대에 사람들을 불러놓고 한숨 쉬었다. "청와대가 감옥입디다. 모두 퇴근하고 집사람하고 둘만 남으면 적막강산도 그런 적막강산이 없어요." 퇴임 닷새 전엔 기자들에게 "5년 동안 영광의 시간은 짧았고 고뇌의 시간은 길었다"고 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 한 달 회견에서부터 "막상 들어와보니 쓸쓸하다"고 했다. "안사람과 두 번 드라이브 나갔는데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디다."

    김대중 대통령은 건강이 어떠냐는 질문을 받자 이렇게 답했다. "매일 거울을 보며 내게 말합니다. '당신은 아플 자유도 없다'고." 마틴 밴 뷰런은 "미국 대통령으로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와 대통령에서 물러날 때였다"고 했다. 대통령이란 집무실에 들어서면서 '5년 뒤 떠나는 순간 내 모습'을 생각해야 하는 자리다. 퇴임 후 트루먼처럼 될지 존슨처럼 될지는 온전히 대통령 자신에게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