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 칼럼] 잃어버린 이승만 동상(銅像)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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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08.11 23:22

최보식·선임기자

주말이면 건국 61주년,세월은 충분히 흘렀고 우리 인식도 성숙해졌다
이(李) 대통령이 '근원적처방'을 하겠다 했을 때
난 '건국 대통령'을 복권시키겠구나 생각했다

서울 명륜동의 한 가정집 앞에 섰다. 고민하던 이웃 세탁소 주인이 열쇠꾸러미를 꺼냈다. "전화로 집주인의 허락을 받아야 하지만…." 쨍쨍한 햇볕 아래 기자가 안돼 보였던 모양이다.

녹슨 철대문에 거미줄이 달라붙었고 좁은 마당에 잡초가 무성했다. 오래된 빈집이었다. 집주인은 강남에 산다고 했다. 담벼락 끝에 이승만 동상 두 개가 나란히 시멘트 받침에 놓여 있었다. 부뚜막 아궁이처럼 보였다.

하나는 양복 차림을 한 상반신 동상이다. 4·19 때 시위대가 탑골공원에 있던 '독재자'를 끌어내린 것이다. 다른 하나는 동상의 머리다. 장면(張勉) 정부가 들어선 뒤 남산 공원의 동상을 중장비로 잘라냈다. 한 인사가 1960년대 후반 고물상으로부터 이걸 사들였고, 그 뒤 이민을 떠나자 지금 집주인은 동상도 함께 넘겨받은 것이다. 그때부터 '잘린' 동상은 가정집의 담벼락 밑에 쭉 있었다.

오늘 이 모습은 1년 반 전 조선일보 사회면 톱으로 보도된 모습 그대로였다. 하나 변한 게 없었다. 이 동상 유물이 마땅히 있어야 할 이화장(梨花莊:이승만 대통령 기념관)이 지척인데도 말이다. 정부도 서울시도 '한 개인의 사생활'처럼 구경한다.

이런 마당에, "나라 행색을 갖춘 나라치고 건국 대통령 동상이 도심에 없는 나라가 없다"는 말은 꺼내기가 겁이 난다. 얼마 전 문을 연 광화문 광장에는 이순신 동상이 있다. 곧 세종대왕 동상도 선다. 우리 역사상 최고의 '히어로(hero)' 선택은 옳다.

굳이 말한다면 우리는 봉건왕조가 아닌 자유민주체제에 살고 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대한민국을 있게 했고, 우리 삶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건국의 아버지' 동상은 아예 논의된 적이 없다. 이 광장에서 입만 벌려도 시끄러웠을지 모른다. 심지어 그와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김구·안창호 선생 동상은 도심 공원이나 광장에 있다. 하지만 광장에는 그의 동상이 설 자리가 없다. '독재자'의 낙인 때문이다.

좌파 쪽에서만 그를 독재자로 깎아내린 것은 아니다. 중년세대가 된 우리 모두가 그런 교육을 받고 자랐다. 물론 '진짜' 독재자인 북한의 김일성 동상은 곳곳에 세워져 있다. 만약 이대로 통일이 된다면 한반도에는 우리의 건국 대통령 동상은 없고, '위대한 수령' 동상만 볼지 모른다.

사실을 추구하는 입장에서 그를 미화할 수는 없다. 그는 고집이 센 노인이었고, 3선 개헌을 시도한 독재자였고, 선거 때마다 돈봉투와 깡패들이 설쳐댔고, 집권 내내 부패하고 혼란스러웠다. 그는 하야함으로써 역설적으로 민주주의를 학습하게 했다.

하지만 해방공간에서 그가 없었다면 오늘과 같은 대한민국은 없었을 게 분명하다. 지금의 북한과 비슷한 처지가 됐을 공산이 높다. 당시 중국과 소련만을 알고 있었거나 '민족'에만 집착했던 정치지도자들 사이에서 그는 거의 유일하게 국제적 안목을 가졌다. 그가 '미국 줄'에 선 것,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선택한 것이 대한민국의 운명을 결정지은 것이다. 천칭 저울에 그의 공(功)과 과(過)를 놓았을 때 어느 쪽으로 기울까.

그의 뒤를 이은 후배 대통령들에게는 그의 편이 없었다. 건국 대통령에 대해 부정적이거나 냉담했고, 혹은 평가에 대해 침묵했다. 어느 정권도 "우린 모두 그에게서 나온 자식들"이라고 인정한 적이 없었다. 이 건국의 아버지에 대한 세간의 지식은 '독재자' 말고는 거의 백지상태다.

구한말 그가 소위 '반정부 시위'의 주동자였음을 요즘 사람들은 모른다. 집안이 망하게 될까 봐 그 부친이 시위 현장을 찾아와 "그만두라"고 눈물로 호소한 광경도 모른다. 체포된 뒤 권총으로 간수를 위협해 탈출했지만 다시 체포됐고, 목에 나무칼을 쓴 채 지냈으며, 감옥 안에서 조선왕조를 감히 '공화제'로 바꾸자는 '독립정신'을 집필했고, 종신형을 선고받고 5년 7개월 만에 풀려난 풍운아의 삶을 알지 못한다.

국제연맹 총회가 열린 스위스 제네바의 호텔식당에서 자리가 모자라 합석한 오스트리아 여인 프란체스카와의 만남이나, 그때 각각 58세, 33세였던 것도 우린 관심 없다. 1941년 겨울 일본의 진주만 기습이 있기 전, 그가 뉴욕에서 일본의 미국 공격을 예견한 '일본 안과 밖(Japan Inside Out)'을 출간한 것도 우린 모른다. 미국에 가장 가까웠던 그를 미국이 가장 껄끄러워했고, 미국 측에 거의 '협박'을 해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받아낸 것도 관심 밖이다. 장대하게 보였던 사진 속 그의 신장이 167㎝였다는 것도 뭐 흥미로운 발견이겠는가.

주말이면 건국 61주년이다. 우리의 인식이 성숙해질 만큼 충분한 세월이 지났다. 이명박 대통령이 '근원적 처방'을 하겠다고 했을 때, 난 속으로 우리의 '건국 대통령'을 복권시키겠구나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