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이 만난 사람] 요트 단독 세계일주 '소방관' 출신 윤태근

입력 : 2011.06.13 03:17

“아내는 날 ‘겁쟁이’로 불러… 바다와 결코 맞서지 않아”

"내가 겁이 많다. 바다를 두려워한다. 지난달 말 둘째 아들이 입대했는데, 그전에 들어올 계획이었다. 아내도 위성전화로 재촉했다. 나는 일본 본토 남쪽의 지치시마(父島)에 도착해 있었다. 거기서 열흘째 대기했다. 필리핀에서 태풍이 발생했다는 기상정보 때문이었다. 뭐, 4~5m 높이의 파도를 무릅쓰면 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자연을 거스를 마음이 없었다. 이런 나를 '겁쟁이'라고 아내는 놀렸다."

마흔여섯 번째 자신의 생일날, 윤태근(48)씨가 단독 세계일주를 위해 몰고 나간 37피트(11.3m) 크기의 요트는 '인트레피드(intrepid·두려움이 없는)'호였다.

―겁 많은 사람이 어떻게 홀로 망망대해를 헤쳐올 수 있었나?

"날씨가 나쁘면 기다리고, 좋으면 출항했다. 나오지 말라는 바다와 결코 맞붙지 않았다. 항해 도중 기상 급변으로 당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악천후 예보를 알면 나가지 않았다. 기다리는 것도 항해다. 요트를 오래 타면서 바다를 알게 된 것이다."

―그러면 애초에 단독 일주를 감행한 것은 무엇인가?

"바다에 살면 지구를 한 바퀴 돌아보고 싶은 꿈이 있다. 태평양을 처음 요트로 횡단한 일본의 호리에씨는 '왜 태평양을 건너갔느냐' 질문받자, '건너가보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간절한 꿈은 사실 이유가 없다. 세계일주를 해보고 싶었다. 나이 마흔 후반이면 떠나서는 안 될 이유가 더 많았다. 겁은 많아도, 내가 원하는 삶을 위해서는 무모한 면은 있다. 모든 걸 완벽하게 갖추려고 했으면 아직도 출발을 못했을 것이다. 이미 돌아와 있는데."

그는 605일 만에 마산(馬山)의 집으로 돌아와 있었다. 총 항해 거리 5만7400㎞. 매스컴마다 그의 귀환을 보도했다.

하지만 나는 궁금증이 덜 풀렸다. 제주부터 장마가 올라온다는 기상예보를 듣고도, 마산으로 내려갔다. 비가 부슬부슬 뿌렸다.

세계일주 후 돌아온 윤씨와 부인.
―단독 항해의 외로움은 사람을 어떻게 만드는가?

"고독, 쓸쓸함, 패배감은 수시로 나를 찾아와 괴롭혔다. 그때마다 인간의 적응력에 대해 놀라곤 했다. 포기하고 단념하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것인지도 알게 됐다."

―단념하기 때문에 마음이 편해졌다는 뜻인가?

"이번 항해 중 칠레 발디비아에서 타이티까지는 기항지(寄港地)가 없었다. 38일간 대양의 한복판에 홀로 떠 있었다. 어느 쪽으로든 보름 넘게 가야 사람을 만날 수 있다. 완전히 고립된 셈이다. 두려움도 느꼈지만, '어떤 일이 벌어져도 나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고 포기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대부분 사람들은 홀로 놓여지면 가상(假想)의 말상대를 만든다고 한다.

"항해 중 위성전화로 메일을 주고받았다. 많은 위안은 됐지만 곁에 대화 상대가 없었다. 말의 욕구는 강렬하다. 나는 거울을 자주 보았다. 그 속의 또 한 사람에게 '윤태근 괜찮지, 힘내라'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곧 좋아질 거야' '고생 없이 세계일주를 한다는 것은 우습지 않나'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사실 극한 상황에서는 홀로 하는 어려움 만큼이나, 파트너가 있어 오히려 갈등을 겪는 경우가 많다는 걸 아는가?

"그게 맞을지 모른다. 둘이서 장기간 항해했다면 아마 끝날 때쯤에는 이미 갈라서 있을 것이다. 혼자 항해하면 적어도 사람 관계로 인해 겪는 트러블은 없다. 그래서 순풍 아래 배가 미끄러져 가면 나는 기타를 치며 보니엠의 '노 우먼 노 크라이(여자가 없으면 울 일도 없어)'를 부르곤 했다."

―당신은 충분히 강하니 감상에 젖어 눈물 뿌리는 일 따위는 없었겠지.

"눈물이 얼마나 많은데. 나도 모르게 서글픈 생각이 들면 절로 눈물이 줄줄 흐른다. 기항지에 정박해 '사랑해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 불러 아내 앞으로 영상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집을 생각하면 마음이 더욱 쓸쓸해졌다."

―항해 중 언제 가장 힘들었나? 내 추측으론 출발 첫날밤이었을 것 같다.

"어, 그걸 어떻게 아는가. 가족·친구들과 이별하고 시커먼 바다 위에서 첫날밤을 맞았을 때 잠이 안 왔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상념이 밀려왔다. 세계 기록을 깨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내 자신에 대한 도전이었다. 하지만 당초 품었던 꿈은 금방 지루하고 고단한 현실이 됐다. 내 항해가 헛되고 낭비적으로도 느껴졌다. 솔직히 항해의 무의미함이 세계일주 내내 나를 괴롭혔다."


소방관·덤프트럭 운전
8시간 요트강습이 전부
일본서 부산까지 요트 배달


―왜 항해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았나?

"사실은 그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변명 같지만 그 답을 찾기 위한 항해가 됐다. 1년 계획이었던 항해가 8개월이 더 늘어나면서 더욱 마음이 쓸쓸했다."

그는 동남아~인도양~케이프타운~대서양~파나마~태평양을 거쳐 들어올 계획을 세웠다. 인도양에서 아프리카 남단의 케이프타운으로 향하려고 했을 때 폭풍 시즌이었다. 항로를 틀었다. 해적이 출몰하는 소말리아 해협을 통과해 지중해로 빠져 대서양을 건너려 했다. 하지만 대서양에는 허리케인이 시작됐다.

"허리케인 시즌이 끝나려면 6개월쯤 기다려야 했다. 두달쯤 장비점검을 한 뒤 남아메리카의 남단으로 항로를 바꾸었다. 그래서 최남단의 비글 해협과 마젤란 해협을 통과해 남태평양을 지나 귀환했다. 처음 계획보다 훨씬 멀고 힘든 항로가 됐다."

―요트는 바람으로 간다. 당신이 계획한 항로는 바람과 관계가 있는가?

"항해 계획은 바람의 방향과 태풍 시즌을 고려한다. 2009년 10월 부산에서 출발했다. 동남아까지는 몬순계절풍을 타고 내려갔다. 인도양에서는 무역풍을 받아 홍해 입구로 나아갔다. 대서양에서도 무역풍을 탔다. 태평양에서는 잔잔한 순풍을 받아 항해했다. 맞바람이 불면 45도의 각도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이런 경우 지그재그로 파도를 헤쳐나가야 한다. 실제 대양에서는 항해하는 데 별로 어려움은 없다. 지구상에서 가장 어려운 곳이 동해와 일본 홋카이도 앞바다다. 바람과 조류, 파도가 급변하기 때문이다."

―당신의 요트는 바람과 파도에서 얼마나 안전한가?

"대부분 요트는 전복되지 않도록 아래에 쇳덩이(밸러스트 킬)가 달려 있다. 내 요트의 전체 무게가 11t인데 킬이 5t이다. 태풍을 만나도 돛을 접고 창문과 해치를 닫아 건 뒤 선실에서 기다리면 된다. 태풍이 지나는 불과 하루 이틀 동안 선실에서는 10년 세월이 흐른 것처럼 늙은 얼굴이 되지만. 나는 행운이 따라줘 작은 폭풍을 만났을 뿐이다. 칠레 기항지에 정박했을때 밤에 폭풍으로 닻이 질질 밀려가 요트가 암초에 부딪칠 뻔한 위기는 있었다."

―기항지에서는 상륙해서 항구의 술집을 찾기도 하나?

"그럴 형편이 못 됐다. 나는 도전에 나선 것이지 여행을 한 게 아니었다. 상륙해서 물과 과일, 식량, 채소류를 구입할 뿐, 기항지에서도 요트 생활을 했다."

윤태근씨는“망망대해에서 밤하늘을 보면 내가 지구인이라는 느낌을 받는다”고 말했다. / 최보식 선임기자
―요트 항해는 작열하는 태양을 연상하지만, 당신은 남미 최남단에서 혹독한 겨울 바다와 싸웠다고 했다.

"남미 최남단 비글 해협과 마젤란 해협을 갔을때 그곳은 여름이었다. 하지만 남극과 불과 600마일밖에 떨어지지 않아 우리의 겨울과 같았다. 실내 온도가 냉장실의 온도와 비슷했다. 그런 곳에서 몇 개월 생활하고 태평양으로 올라왔는데 수염이 평소보다 거칠고 많이 자랐다. 추위에 피부를 보호하기 위해, 마음뿐만 아니라 몸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단독 세계일주에는 어떤 룰이 있는가?

"남반부와 북반부를 두루 거쳐야 한다. 중간에 항해를 멈췄다가 해도 되지만 요트에 다른 사람을 태워서는 안 된다. 항해 일정이 길어지면서 요트를 현지에 두고 국내로 들어와 가족의 경제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 하지만 쉬었다가는 다시 시작하기 힘들 것 같았다."

―가족 생활비는 어떻게 해결했나?

"출발할 때 일년치 생활비를 마련해놓고 떠났다. 항해 기간이 늘어나자 아내가 임시교사를 했다. 세 아들 중 첫째와 둘째는 대학을 휴학하고 입대했다."

―당신이 중간에 포기하려고 했을 때, 부인이 막았다고 들었다.

"바다는 내가 헤쳐나갈 수 있지만, 집안의 문제는 항해 중인 나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어쩌면 내가 오랜 항해로 지쳐 집안 문제가 더 크게 다가왔는지 모르겠다."

―항해를 계속 이어갔던 것은 가령 남자의 체면, 의무감 때문이었나?

"마음이 나약해질 때마다 내가 세 아이의 아버지이자 한국 요트인의 대표로 항해를 하고 있음을 떠올렸다. 중간에 돌아왔다면 나는 요트를 완전히 떠났을 것이다. 중단하는 것이 항해를 이어나가는 것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세상의 시선 때문에 진정한 자신을 위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그는 해운대 소방서에서 소방관으로 7년간 근무했다. 그 뒤 덤프트럭을 운전했다. 자신에게 더 맞는 일을 찾다가 요트를 알게 됐다. 2003년부터 요트붐이 불었다. 그는 일본의 중고 요트를 몰고 대한해협을 건너 우리 구매자에게 갖다 주는 '요트 운송대행업'에 뛰어들었다. 시작할 때 그의 요트 경력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8시간 요트강습을 받은 게 전부였다.

"어느 날 인터넷으로 주문이 들어왔다. 오사카에서 요트를 찾아서 부산까지 몰고 오는 일이었다. 세관 절차까지 모두 밟아야 한다. 그때만 해도 일본어를 몰랐다. 나는 '도꼬 데스까(어디입니까), 오사카니 이끼마스까(오사카로 갑니까), 디스카운또 오네가이시마스(깎아주세요)' 딱 세 마디만 준비했다. 해도(海圖) 세 장을 들고 부관(釜關)페리를 타고 가면서 정말 암울했다. 과연 해낼 수 있을까. 밤하늘의 북두칠성이 몇 시에 어느 방향에 있는지 메모했다. 어쨌든 열흘 만에 요트를 몰고 왔다. 내 평생 가장 무서운 항해였다. 나는 '일'로써 요트를 탔기 때문에 처음부터 프로였던 셈이다. 그 뒤로 대한해협을 120차례 오갔다. 한번 몰고 올 때마다 300만원쯤 번다."


무모한 사람이 '역사' 바꿔
남들에게는 무모해 보여도
나는 가능하다고 생각


―무모하다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다.

"주변에서 말렸을 때, 나는 '옛날 조상들은 기상 정보도 없이 노 젓는 뗏목으로 왔다갔다 했다'고 말했다. 보통 사람들 눈에는 무모해 보일지 모르나, 나는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한다. 무모한 사람들이 '역사'를 써나간다. 마젤란이 세계일주를 할 때도 지구가 둥글다는 100% 확신을 갖고 시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요트로 한 바퀴 돌아본 지구는 어떠했나?

"망망대해에서 별을 올려다볼 때 내가 '지구인'이라는 걸 느꼈다. 나는 돌고래와 갈매기, 수많은 물새들, 날치와 많은 고기들을 보았다. 어느 순간부터 그들이 우리 별 지구에 같이 살고 있는 한 핏줄의 생물로 느껴졌다. 심지어 파리와 모기에게도 말이다."

―또 다른 것도 깨달은 게 있나?

"요트는 유럽과 미국에서는 일상 레저다. 혼자서 요트 일주를 하는 일흔이 넘은 할머니를 만난 적도 있다. 우리나라는 3면이 바다라도 해양국가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생각해보면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물가에 가지 마라'고만 했지, 수영을 가르치려고 하지 않았다."

마산 골목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나오니 비가 더 뿌렸다. 거리가 밤바다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