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김광웅] 삶처럼 아름다운 건데…

[2010.10.25 17:41]   모바일로 기사 보내기


“죽어서도 값진 이름으로 남아야 한다. 현재의 삶에만 의미를 둘 것은 아니다”

70년대 입 뻥긋 못하던 유신 때 서울교수 생활이 지겨워 ‘유엔 아시아 태평양 경제사회이사회(UN ESCAP)’ 사무국에서 일하러 태국 방콕에서 2년 산 적이 있다. 부임 때 집을 얻기까지 사무국 가까운 시내의 한 호텔에 묵으며 도보로 15분가량 걸리는 사무실에 매일 출근했다.

민가가 들어찬 좁은 골목길을 지날 때마다 길바닥을 뿌옇게 덮은 흰 가루에 무심했다. 어느 날 같은 장소에서 흰 가루가 바람 타고 날아오는 것을 보면서도 그냥 지나쳤다. 그것이 민가 바로 옆에 있는 화장장에서 날아오는 골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지 않았다. 죽음에 대한 인식이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에 따라 저렇게 차이가 나는 줄 몰랐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간 김에 에바 페론의 무덤을 보기 위해 시내에서 30분가량 떨어진 공동묘지에 간 적이 있다. 대리석으로 미니 교회처럼 유택을 짓고 그 앞엔 예쁜 꽃들이 놓여 있던 기억이 난다. 근자에 어느 프랑스 친구가 상을 당한 후 부친을 병원이 아닌 집에서 며칠 모신 것이 그렇게 편하고 흡족했다고 하는 것을 들었다.

에반스턴처럼 소도시가 많은 미국에는 예외 없이 주택가 한편에 공동묘역이 있다. 그런가 하면 카우이섬 남서쪽 태평양이 한눈에 펼쳐지는 바닷가에도 공동묘역이 있다. 도쿄 록폰기에도 큰길에서 벗어나 뒷골목에만 가도 공동묘역이 있다. 유럽 성당은 역사적 인물들을 성당에 모신다. 우리도 동작동이나 망우동은 시내에 자리 잡고 일반인을 위한 공원 구실을 한다. 분당의 중앙공원에도 도시 개발 때 근처의 지석묘(고인돌)군 중 10기를 따로 모셔 근사하게 자리 잡고 있다. 경주의 왕릉은 관광코스다. 죽음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 습관은 죽음을 혐오스럽게 생각한다. 원지동 추모공원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다. 화장시설이 들어서면 땅값, 집값이 떨어진다며 한사코 반대하는 주민들의 마음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방사성 폐기물 처리 때문에 부안에서 큰 저항이 있었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 일게다.

이 세상에는 분명한 것과 분명하지 않은 것이 한 가지씩 있다. 앞의 것은 우리 누구나가 죽는다는 사실이고 뒤의 것은 우리 누구나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이런 삶과 죽음의 한 선상에서 인간은 안간힘을 다하며 산다. 길거나 짧게 또는 어떤 삶을 살았느냐의 내용상 차이가 있을 뿐이다. 삶은 더 길어질 가능성이 높다. 2000년 미국 국립나노연구소 창립 기념식에서 연설한 클린턴 대통령은 금년에 태어난 아이들은 100세를 산다고 했다. ‘특이점(singularity)’이라는 책을 내 유명한 레이 커즈 와일은 2040년부터 인간은 죽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다.

죽음을 생각하든 아니하든 우리는 살려고 애쓴다. 예외가 있긴 하지만 죽으려고 애쓰는 사람은 없다. 그만큼 죽음보다는 삶이 좋다고 생각하기에 그런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며 연극 오구에서 주인공이 너스레를 떤다. 그러나 때로 죽음이 더 고귀할 수도 있다. 죽어서도 값진 인간으로 남아야 한다. 삶에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 죽은 후의 나는 어떤 모습일지를 생각해야 한다. 그러니 삶과만 가까이 하려고 하지 말고 죽음과도 친해야 한다. 누구에게나 죽음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으니.

우리에게는 독특한 장례문화가 따로 있어 지금의 관습을 어기거나 고쳐 남의 나라처럼 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삶과 죽음은 하나이며 같은 선상에서 생각하고 싶은 것은, 현재의 삶에만 의미를 두는 것보다는 죽음 뒤에도 의미를 둔다면 현재의 삶이 조금이나마 더 여유롭고 의미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을 마감하고 육신이 어디로 가든 영혼은 늘 우리 곁에 있을진대 주검 때문에 느끼는 심리적·감각적 거부감을 우리 마음에서 거두면 부담은 훨씬 줄어들 것이다. 죽음도 삶처럼 아름답다고 생각하자. 속세에 찌든 삶보다, 제도의 틀에 갇힌 삶보다 죽음이 훨씬 홀가분하고 자유로울진대 죽음을 삶과 다르다거나 혐오스럽다고 하는 느낌을 조금씩 지워 가는 것이 현명하지 않을까?

김광웅 서울 대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