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앞에 보이는 착각에서 벗어나 사회 구조의 본질을 아는 후보를 뽑아야 한다”

“빨리 치우세요, 사장님 곧 오십니다.” 수위가 다가오더니 어디다 차를 세울지 물으려는 나에게 빨리 비키라고 한다. 종편 TV에 출연하기 위해 갔던 어느 신문사 앞에서의 일이다. 정부의 말단 완장이나 호루라기 행패를 비판하는 언론이라고 다를 줄 알았던 착각이 구조의 본질을 일깨운다.

사장은 말단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른다. 후보 단일화를 노리는 양 진영의 위·아래도 손발이 맞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구조라는 것이 원래 그렇다. 피라미드 꼭대기와 밑은 별개의 세계다. 구조는 본질적으로 안에서 다투고 밖과도 그렇다. 남을 이겨야 내가 산다고 생각하는 것은 상식이다. 구조와 구성원 누구도 권력과 지배라는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대통령도 예외가 아니다.

구조는 인간, 정보, 기술, 기회 등으로 얽히고설킨 구성체다. 구조에는 계층이며 분파며 여러 요소가 갈기갈기 찢겨 존재한다. 오바마가 승리 연설에서 3억 인구의 민주주의란 소란하고, 뒤엉키고, 복잡한 것이라고 했던 것도 같은 이야기다. 구조의 본질이 그러한데 사람들은 흔히 구조가 온전한 줄 알고, 또 구조가 강해야 구성원이 산다고 믿는다.

대선에서 이기려면 당이 강하고 후보도 강하고 이미지도 어필해 상대를 눌러야 내가 이긴다고 생각한다. 지배의 욕망이 넘쳐나는 세상에서는 당연하다. 그러나 권위와 지배의 시대가 가고 공존과 조절의 시대에 접어든 지금도 그래야 할까?

노자와 장자가 말하는 무명자(無名者)란 작고 적고 그래서 있으나 마나 한 것이다. 그런데도 지배될 수 없고 종속되지 않는다. 소멸하지도 않는다.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는 것이 있고, 들으려고 해도 들리지 않는 것도 있다. 나아가 써도 다함이 없는 것, 어디에나 미치고 막힘이 없는 것이 있다. 결코 지배되고 종속되지 않는, 다함이 없고 막힘이 없는 것은 마초보다 여성성, 나아가 일반 국민의 존재와 가치를 말한다.

구조와 제도는 언제 어디서나, 누굴 위해서나 있어야 질서가 유지되니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안 된다. 그럼 과연 무엇일까. 무명자가 그런 것이고 도(道)가 바로 그렇다. 질서가 유지되는 것이 진정 이 때문이고, 부드럽고 약한 것이 굳고 강한 것을 이긴다는 원리가 살아 있기 때문이다.

대선이 종반으로 치닫고 있는데 대통령 뽑자는 것인지, 야권 단일후보 뽑자는 것인지 모를 일이 벌어지고 있다. 판단의 기준은 오로지 여론조사다. 여론조사 결과가 마치 내비게이션이라도 되는 양 좇아가고 있는데, 본질은 물론 도(道)도 모르는 채 수(數)만 따라가며 일희일비한다. 여론조사도 미시적일 뿐이다.

미국은 부모, 교회 출석, 도시·농촌 거주, 18∼29세와 65세 이상, 보수와 진보, 티 파티 지지 여부 등을 따로 분석하니 좀 세세한 편이다. 그러나 자료 하나하나를 보는 대신 빅 데이터로 패턴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2002년과 2007년의 연령별 투표율을 분석해 2012년 대선결과를 점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지난 20년간 성별, 연령별, 학력별, 종교별, 직업별, 지역별 투표성향을 분석하면 이번 대선의 흐름과 패턴을 알 수 있다. 미국도 이런 분석이 일반 여론조사의 예측 정확도를 훨씬 앞섰다. 이 데이터 과학이라고 하는 것은 생물학적 지각의 패러다임에서 패턴과 흐름 등 전체를 보려는 입장이다. 이 단계도 거쳐야 도의 세계가 보인다.

후보들은 지금도 서양의 합리주의가 바탕인 같음의 사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만 달성하면 된다는 오만, 구조의 구심력만 생각하고 이성 내재적 착각에서부터 그런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환원 불가능한 욕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서양철학을 지배하는 ‘지금 여기’의 우위, 즉 진리의 현전(現前)으로 향하는 욕구, 이 현전의 욕구가 일으키는 착각에서 벗어나 다른 사고도 하고 간과한 큰 그림도 보고 무명자도 생각하면서 구조의 본질을 제대로 알고 정부를 잘 운영할 수 있어야 한다. 이번 대선 후보 중 누가 그럴 수 있을까?

김광웅 서울대 행정학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