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미레를 버린 스승들

강성남 교수 한국방송통신대 행정학과 | 제218호 | 20110515 입력
어릴 적에는 어머니 심부름으로 쌀가게에 자주 갔다. 가게 주인은 쌀을 되에 가득 담고 되 위를 평미레로 쓰윽 훑고 나서 되 속에 든 쌀을 봉투에 담아줬다. 평미레를 한자로는 ‘개(槪)’라 한다. 같은 종류의 생각(念)들을 되에 담고선 ‘개’로 훑어내면 되 속엔 개념(槪念)이 남는다. 이를 통해 우리는 세상의 사물을 이해한다. 평미레는 개념과 개념 밖의 것을 경계 짓는 도구인 셈이다. 평미레에 밀린 생각이라 해서 사물을 이해하는 데 쓸모없는 게 아니다. 때때로 우리는 되 속의 개념에 사로잡혀 세상의 다른 측면을 이해하지 못하곤 한다.

학교란 일종의 개념을 전달하는 곳이기도 하다. 선생님 중엔 기존의 개념만을 전달하는 분이 있는가 하면, 새로운 개념을 만드는 분도 있다. 선생님이 되 속에 담긴 생각만을 학생들에게 주입하는 기술에 관심을 가질수록 그들은 기능인이 되어간다. 진정한 스승이란 되 속의 개념이 아닌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내는 ‘창조인’일 성싶다. 스승은 학생들로 하여금 여러 모양의 되를 만들어 거기에 새로운 생각을 넣도록 돕는다. 예컨대 과일가게 이름으로 딱 맞을 법한 애플사의 사령탑 스티브 잡스는 세상을 바꾸는 ‘튜링의 사과’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냈다.

오늘은 세종대왕 탄신일이자 제30회 스승의 날이다. 제자들이 스승의 은혜를 기리는 날로 기념하고 있다. 이런 의미는 교육당국이 생산한 ‘되 속의 개념’이다. 제자들이 스승을 기리는 날을 스승이 제자를 기리는(?) 날로 개념을 바꾼다면 말썽 많은 학교 촌지가 없어지지 않을까?

나의 스승은 몇 년 전부터 스승의 날을 제자에게 감사하는 날로 바꾸기 위해 이모저모 애쓰셨다는 사실을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이태 전 스승의 날 두 달 전에 나는 은사로부터 초대장을 받았다. 제자들을 스승의 날 저녁에 초대해 축하공연을 하신다는 거다. 프로그램이 너무나 의외였다. 1부는 은사의 은사께 감사의 정을 표하는 시간으로 구성되었다. 2부에는 그야말로 제자들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화려한 공연 프로그램이 들어 있는 게 아닌가. 나는 ‘역시 그분답다’고 생각했다. 강의실에서도 학생들에게 ‘늘 새롭게 달리 생각하라’고 가르쳤던 분이라 이런 이벤트를 기획한 은사의 의도가 새삼 마음으로 다가왔다. 나는 그해 두 달 전부터 스승의 날 행사를 손꼽아 기다렸다. 세계 최고의 파바로티의 공연이나 암스테르담 콘체르트 헤보 오케스트라의 연주보다 더 큰 기대로 가슴이 설렜다.

드디어 스승의 날 저녁. 은사는 제자들에게 “자네들이 있어서 내가 스승이 되었네. 그래서 스승의 날이 나의 날이 되었네”라고 말씀하셨다. 이어서 곧바로 축하공연을 하셨다. 보타이와 연미복까지 갖춰 입으신 은사가 제자들 앞에서 축주와 함께 손수 작사한 노래를 부르시는 모습에 모두 감동했다. 이날 은사가 제자들에게 보여준 것은 공연뿐만 아니었다. 큰 되에 다양한 생각을 담는 넓은 개념을 만드는 방법이었다. 이날 참석하지 못한 제자들은 크게 후회했다. 올해 10월엔 오페라 공연을 선물하신다니 기대만발이다.

지금 우리에겐 시험이나 취직을 돕는 ‘되 속의 개념’을 주입하는 기능인 선생님보다는 새 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되 밖의 개념’을 만들어내는 창조인 스승이 필요하다. 세상은 평미레를 버리는 선생님을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학부모들이 선생님에게 돈봉투와 선물(?)을 건넬 기회를 원천 봉쇄한다는 명분으로 스승의 날에 휴교를 하는 저간의 사정. 거기엔 우리가 경시하는 되 밖의 개념이 있다. 오늘처럼 스승의 날이 일요일이어서 천만다행이라 여기는 우리 사회. 그 상황이 참으로 딱하다 못해 슬프기까지 하다.




강성남 1992년 서울대 행정학 박사 학위를 딴 뒤 대학·국회·시민단체에서 활동해 왔다. 저서로 『부정 부패의 사회학』 『행정변동론』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