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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이야기] "제자들이 고마워…" 감사의 노래하는 老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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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05.15 03:24

스승의 날 '작은 음악회' 여는 김광웅 서울대 명예교수
직접 노랫말 쓴 '한 사랑' 음대 교수가 곡(曲) 붙여줘

백발의 노(老)교수가 책상 서랍에서 악보를 꺼냈다. 복도를 지나는 학생들이 들을까 봐 슬그머니 연구실 문을 닫고 자리에 돌아왔다. 노교수는 "흠, 흠" 목청을 가다듬고 가곡을 부르기 시작했다.

"한 사랑 나무 되어 여린 가지 내밀더니 어느덧 굵은 줄기 꿋꿋이 드리웠네…."

14일 오후 서울대 리더십센터. 1972년부터 2007년까지 35년간 서울대 교수로 봉직한 김광웅(68) 서울대 명예교수가 상임고문을 맡아 강의하는 곳이다. 서울대행정대학원장, 한국행정학회장, 초대 중앙인사위원회 위원장을 두루 지낸 김 교수는 이날 손녀뻘인 윤재원(여·20·서울대 성악과 3년)씨 앞에서 진지한 태도로 노래를 불렀다. 다 부르고 나서 소년처럼 얼굴을 붉히고 "이 정도면 듣기 괜찮으냐"고 물었다.

윤씨가 "목소리는 좋으신데…" 하고 웃었다. "느낌을 살리는 건 좋지만 음정은 악보대로 불러주세요."

윤씨는 지난해 김 교수의 강의를 수강한 제자이지만 지금은 김 교수에게 노래를 가르치는 '음악 선생님'이다. 김 교수는 이달 들어 매주 한 번씩 윤씨를 초빙해 '레슨'을 받고 있다. '스승의 날'인 15일 서울 서초동의 한 갤러리를 빌려서 은사와 제자 4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감사 콘서트'를 열기 위해서다. 쌈짓돈 1000만원을 들여서 마련한 자리다.

14일 오전 서울대 문화관 강당에서 김광웅(가운데) 서울대 명예교수가 제자 5명과 함께 노래 연습을 하고 있다. 김 명예교수는 스승의 날인 15일 자신의 은사와 제자 40여명을 초청해 감사 콘서트를 연다./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행사 때 김 교수가 부를 노래 제목은 '한 사랑'이다. 김 교수의 자작시(詩)에 서울대 음대 작곡과 최우정(41) 교수가 곡을 붙여준 창작 가곡이다. 김 교수는 "큰 사랑이라는 뜻"이라며 "스승과 제자, 친구들이 제게 준 큰 사랑으로 지금의 제가 있다는 의미"라고 했다. 김 교수는 "강단에 있으면서 오랫동안 '대접'만 받았다"며 "올해는 내가 은사와 제자들을 초대해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고 했다.

"재작년 정년 퇴임을 한 뒤 책을 쓰고 인생을 되돌아보면서 잊고 지냈던 은사와 제자들이 하나 둘 떠올랐어요. 학교에서 저를 가르치신 선생님들은 물론이고 제가 가르친 제자 중에도 세상을 떠난 분들이 하나 둘씩 늘더군요. 제가 받았던 배움을 다 갚지도 못했는데 말이죠. 그래서 올 초부터 이번 행사를 준비하기 시작했어요."

행사 취지를 들은 최 교수가 흔쾌히 작곡을 맡았다. 피아노 반주가 녹음된 테이프도 만들어줬다. 김 교수는 이 테이프를 수십 번씩 돌려가며 듣고 선율을 외웠다.

김 교수는 "날짜는 다가오는데 노래 부를 생각하니 걱정"이라며 "연구실에서 부르자니 학생들 눈치가 보여서 주로 차 안에서 큰소리로 혼자 노래를 부른다"고 했다. 그는 지난달 주소록을 뒤져서 은사와 제자들의 명단을 뽑았다.

노란색 초청장을 받은 제자들은 깜짝 놀랐다. 서울대 행정대학원 제자인 문지은(여·33)씨는 "2년 전 정년 퇴임하실 때도 '제자들 부담 주기 싫다'고 하셔서 기념식도 열어 드리지 못했다"며 "그런데 선생님께서 거꾸로 제자들을 초대해주시다니 민망하고 또 감사했다"고 했다.

이날 행사에는 대학총장, 국회의원, 정부 고위 관리가 된 제자들뿐만 아니라 김 교수의 은사들도 참석할 예정이다. 1968년 김 교수가 미국에서 정치학 박사를 할 때 지도교수였던 마이클 하스(Haas·70) 하와이대 명예교수가 태평양을 건너 날아올 예정이다. '청년 김광웅'이 제출한 논문 초안 여백에 깨알처럼 작은 글씨로 보완해야 할 내용을 빽빽하게 적어주고, 논문이 통과된 뒤엔 집으로 불러 손수 스테이크를 구워줬던 은사다. 유학 중이던 김 교수에게 편지를 보내며 조언을 해주던 1세대 행정학자 유훈(80) 서울대 명예교수도 참석할 예정이다.

"여러 스승님들 덕분에 지금의 제가 있는 거겠지요. 학교와 사회에서 가르쳐 주신 선생님들, 제가 가르치며 도리어 배웠던 제자들…. 그 고마운 스승들을 모시고 평생 가르침을 새기고 보답하고 싶었습니다."

김 교수는 "기삿거리가 되느냐"며 취재 요청을 여러 차례 사양했다. 취재가 끝나갈 때 그가 "노래 연습 이외에 고민이 하나 더 늘었다"고 했다.

"그냥 조촐한 행사를 하려고 한 건데 혹시 기사 보고 왔다가 장소가 좁아 돌아가는 제자가 생기면 어쩌지? 미처 초대장을 못 돌린 분들께는 죄송해서 어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