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책 선정위원회’가 고른 新고전<21> 『정치권력과 사회계급』‘상대적 자율성’ 개념 유행시킨 新국가론손호철 서강대 교수·정치외교학과 | 제64호 | 20080601 입력  

개인의 삶을 좌우하는 가장 거대한 힘 하나를 꼽으라면 아마 국가일 것이다. 세금에서부터 교육·군대·규제 등 그 영향력은 끝이 없다. 따라서 지난 수천 년 동안 정치학의 중심 주제가 국가였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후 정치학도 자연과학처럼 객관적인 연구를 해야 한다는 과학주의 흐름 속에서 국가는 비과학적인 낡은 개념으로 매도되어 정치학 연구에서 사라져 버렸다. 이 같은 상황에서 국가론을 부활시킨 것이 프랑스의 신좌파 이론가 니코스 풀란차스가 1960년대 말 발표한 『정치권력과 사회계급』이다.

이 책은 전문가들도 읽기에 고통스러운 어려운 개념들로 가득 찬 난해하기 짝이 없는 책이라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백으로 남아 있던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을 체계화한 최초의 저작으로, 마르크스주의의 약점이라고 불리던 국가론 분야를 오히려 마르크스주의가 주류이론에 비해 경쟁력을 갖춘 분야로 만든 역사적인 저작이다. 나아가 이 책은 그동안 사라졌던 국가론의 폭발을 마르크스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주류이론에도 가져다 준 기폭제였다는 점에서 ‘신고전’으로 불릴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다. 사실 한때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학생이면서 이를 모를 경우 지진아 취급을 받았던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이라는 개념을 유행시킨 것도 바로 이 책이다.
기존의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국가와 정치는 경제에 의해 결정되며 자본주의 국가는 자본가 계급의 도구라는 조야(粗野)한 이론이 주종을 이루었다. 특히 국가를 장악하고 있는 고위 공직자 등이 대부분 자본가 출신이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자본주의 국가가 자본가 계급의 도구라는 것을 증명하려 했다. 반면에 풀란차스는 국가가 경제에 의해 결정되지만 경제의 단순한 반영물이 아니라 그 나름의 상대적 자율성을 갖고 있으며 자본주의 국가는 봉건제 등 다른 계급국가와 달리 자본가 계급이 직접 통치하지 않는 특징이 있다고 주장했다.

자본은 하나가 아니라 이해관계를 달리하며 경쟁하는 복수의 자본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자본가 계급이 직접 국가를 장악하고 통치하는 경우 이를 장악한 특정 자본의 단기적이고 편협한 경제적 이익을 대변함으로써 자본가 계급 전체의 진정한 이익을 반영할 수 없다. 오히려 국가가 자본가 계급으로부터 상대적 자율성을 가지고 자본가들의 단기적이고 편협한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펼 수 있을 때 자본가 계급의 장기적이고 보다 근본적인 이익을 지켜줄 수 있고, 자본주의가 무너지지 않고 유지될 수 있도록 만들어 줄 수 있다. 결국 이 책에 따르면 김대중 정부가 재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추진한 재벌 개혁이 표면적으로는 반(反)재벌적인 정책으로 보이고, 따라서 김대중 정부가 반재벌, 반자본의 국가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국가가 상대적 자율성을 가지고 재벌 개혁을 추진하는 것은 재벌의 장기적인 이익을 보장해 주는 친(親)재벌, 친자본적인 정책이라는 분석에 이르게 된다.

『정치권력과 사회계급』 Pouvoir politiques et classes sociales 니코스 풀란차스, 1968, 풀빛(1996)  

특히 저자는 소련식의 교조적 마르크스주의 외에도 유럽의 사회민주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노동자 계급 등이 선거를 통해 국가를 장악하면 사회주의가 될 것이라는 사회민주주의의 ‘국가 장악’ 전략은 자본주의적인 이유로 자본가 계급이 국가를 장악하고 있다고 보는 ‘도구주의’ 국가론에 기초해 있다. 따라서 국가를 장악한 사람만 바꾸면 국가 성격이 바뀔 것이라고 착각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그러나 국가의 자본주의적 성격은 구조적인 것이기 때문에 설사 좌파가 국가를 장악하더라도 반자본적인 정책을 펼 수 없으며 따라서 자본주의 국가를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분쇄해야 한다는 급진적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후 풀란차스는 이 책이 지나치게 구조결정론적이라고 자기비판하고 국가는 다양한 사회 세력 간 힘의 관계의 응집이자 전략이라는 ‘전략관계’적 국가론을 발전시켜 나갔다. 또 ‘장악론’과 ‘분쇄론’을 넘어 국가 안팎의 이중투쟁을 통해 국가 성격을 변혁시켜 나가야 한다는 ‘국가변혁론’으로 나아갔다. 그의 전략관계론은 지금도 국가론 연구의 기본 지침이 되고 있는 가장 선진적인 이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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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新)고전=지난 반세기 동안 출간된 책 중 현대사회에 새로운 시대정신이나 문제의식을 제공한 명저.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산하 ‘좋은책 선정위원회’가 중앙SUNDAY 독자들에게 매주 한 권의 신(新)고전을 골라 드립니다.